희한한 경험이었다. 서울 여의도 회사 근처에서 동료들과 저녁을 먹고 나오는데 지금껏 눈에 띄지 않던 조형물이 눈에 들어왔다. 영국 조각가 헨리 무어의 작품이 연상되는 추상 형태. 전에도 자주 그 앞을 지나쳤다. 그런데도 한 번도 존재를 의식하지 못한 건 그 빤함 탓이었을 게다. 최근 국민일보에 ‘조형물 공해 개선 3년 서울은 어찌 바뀌었나’ 시리즈를 게재한 뒤 내게 새로운 변화가 생겼다. 갑자기 도심 곳곳의 조형물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백화점에 구두를 사러 가려고 하면 지나가는 사람 구두만 쏙 들어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명색이 미술품인데, 그건 상가건물 앞 화단 위에 임시로 올려둔 물건처럼 설치돼 있었다. 주변은 청소를 하지 않아 너저분했다. 도처에서 비슷한 처지의 조형물을 어렵지 않게 목격했다. 화단 위에, 계단 옆에, 쪼그리고 앉듯, 꿔다놓은 보릿자루마냥 옹색하게 설치돼 있는 조형물들. “정말 안하고 싶었지만 법으로 하라니까 어쩔 수 없이 한다”는 건축주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일단 설치하고 나면 주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는 듯했다. 조형물에 쓰레기를 투기하고, 광고판으로 가리고, 짜장면 집 스티커를 붙인다. 이렇게 관리가 부실해 동네 전봇대 신세가 되는 조형물을 설치하도록 민간에 꼭 강요해야 하는 것일까, 회의가 생길 정도다.
‘차라리 나무를 심어라’ ‘세금 낭비에 부패 요인이 되고, 후대엔 거대한 환경오염 덩어리’.
기사에 대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독자들도 ‘조형물 피로증’에 공감하는 것 같았다. 무수한 댓글은 변화에 대한 촉구로 읽혔다. ‘조형물 대신에 그 자리에 나무 하나 더 심자’는 글이 유독 많은 건 생태 파괴가 불러온 ‘코로나19 시대’라 더 그랬을 것 같다. 서울시는 ‘그린 뉴딜’의 일환으로 3000만 그루 나무심기 계획을 2022년까지 완료해 공원을 강화한다.
일정 면적 이상 신·증축 건물에 건축비 1%(2000년부터 0.7%)에 해당하는 미술작품을 설치하도록 의무화한 ‘건축물 미술작품’ 제도는 1972년 제정된 문화예술진흥법에 근거한다. 말하자면 거의 반백 살이 된 법이다. 아파트도 30년이 넘으면 재건축을 하도록 허용한다. 이 법도 시대 변화에 맞춰 최소한 리모델링이 필요하지 않을까.
폐지론이 없는 건 아니었다. ‘차라리 나무를 심자’는 댓글은 이 제도에 대한 시민들의 냉정한 평가다. 하지만 예술의 힘을 믿는 전문가들은 존속을 주장한다. 제도의 보완, 유연한 적용, 새로운 해석을 주문한다. 서울시 등 지방자치단체도 제도 개선에 의욕을 보이긴 했다. 서울시가 2017년 가을 조례 개정을 통해 조형물 심사를 깐깐하게 한 것이 그런 예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부족하다. 창발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공공미술 전문가 A씨는 “공공미술에서 과거엔 작품 그 자체에 주목했다면 지금은 작품을 도시에 활력을 주는 매개로 인식하는 방향으로 추세가 바뀌고 있다. 퍼블릭 아트(공공미술)가 아니라 어번 아트(도시미술)의 개념이 생겨나고 있다”고 말했다. 조형물이 해당 건물 단위를 벗어나 지역 전체에 활력을 주기 위해선 1개 건물에 1개 조형물을 꿰맞추듯 세우도록 한 현행의 답답한 공식은 깨져야 한다는 제안도 나온다. B씨는 “현행 ‘나카마’(중개상을 뜻하는 일본말) 수준의 대행사가 아니라 외국처럼 도시를 디자인하는 역량을 갖춘 비영리 공공미술 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뉴욕의 공공미술품 설치 작업을 주관하는 비영리 미술기구 ‘퍼블릭아트펀드’가 그런 예다. 구글에서 ‘퍼블릭아트펀드(public art fund)’를 검색해보라. 도시 환경을 바꿀 수 있는 예술의 힘을 실감할 것이다. 관련 법을 관장하는 문화체육관광부가 그걸 검색해봤으면 좋겠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겸 논설위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