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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돌아온 미국 ‘마약성 진통제 재앙’… 빈곤층이 쓰러진다



미국 사회를 병들게 만들었던 전염병이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 한층 어두운 모습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오피오이드 중독’이라는 전염병이 그것이다. 코로나19가 드리우는 경제적·심리적 그림자 속에서 오피오이드 중독이 늘고 있어 미국은 이중의 전염병 위기에 처했다.

오피오이드(opioid)는 인간의 신경계에 작용해 통증을 완화하는 마약성 진통제다. 아편, 펜타닐, 옥시코돈, 모르핀 등이 대표적이다. 중독 위험 탓에 함부로 쓰여서는 안 되는 오피오이드가 미국에서는 1990년대 후반부터 합법적으로 처방됐다. 제약에서 풀려난 오피오이드는 대규모 중독 사태를 초래했다. 의학적으로 오피오이드가 전혀 필요치 않은 미국인 수백만명이 약물중독자로 전락했고, 수십만명이 약물 남용으로 목숨을 잃었다.

‘오피오이드 남용장애’를 앓고 있는 이들에게 코로나19는 재앙이다. 코로나19로 인한 경기침체와 실업, 사회적 고립 등이 약물에 대한 욕구와 의존도를 늘리기 때문이다.



절망이라는 전염병, 오피오이드 중독

미국 의사들은 오피오이드를 암 환자나 시한부 환자, 수술 후 극심한 통증을 겪는 환자들에 한해 제한적으로 사용해 왔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 오피오이드에 대한 규제가 완화되고 그 틈을 노린 제약회사들이 공격적 마케팅에 나서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퍼듀, 존슨앤드존슨, 테바 등의 제약사는 오피오이드 약품을 통증완화제로 팔면서 “오늘부터 고통을 참지 않아도 된다”고 선전했다. 아편계 진통제라 중독성이 강하다는 사실은 숨겼다. 마케팅 책임자들은 “헤로인과 똑같은 진통 효과를 발휘하면서도 중독성은 없는 제품을 만들어냈다”며 의사들을 안심시켰다. 제약사들의 탐욕에 발맞춰 의료 종사자들은 미국 시민들에게 더 많이, 더 자주 오피오이드를 처방했다.

중독성 약물을 엄격히 감시해야 할 의료 당국은 제약사들의 로비에 넘어가 관리·감독 책임을 방기했다. 지난 2017년 내부고발자의 입을 통해 미 마약단속국(DEA)이 얼마나 제약사들에 장악돼 있었는지 그 실태가 드러나기도 했다.

마약성 진통제 대중화의 결과는 처참했다. 미 국립보건원(NIH)에 따르면 2017년 한 해에만 4만7000여명의 미국인이 오피오이드 오남용으로 사망했고, 170만명이 중독 질환으로 고통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1997년부터 2017년까지로 범위를 넓힐 경우 20년간 70만20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지금도 매일 130명이 오피오이드 오남용으로 목숨을 잃는 것으로 추정된다.

미국의 부실한 공공의료 제도는 상황을 악화시켰다. 값비싼 의료비 탓에 빈곤층을 중심으로 치료보다 마약성 진통제에 의존하는 모습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프린스턴대학의 앵거스 디턴과 앤 케이스 교수는 지난 25년간 수입이 줄고 일자리 전망이 급격히 악화된 저학력 백인 중년 남성들이 손쉽게 마약성 진통제에 손대기 시작하면서 약물 중독으로 숨지는 사례가 급격히 늘어났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자살,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사망을 포함해 이 같은 죽음의 형태를 ‘절망사’로 정의했다.

두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1995년 연간 6만5000명 수준이었던 절망사 사례는 2018년 연간 15만8000명으로 늘어났고, 전적으로 4년제 대학 학위가 없는 빈곤층에 집중됐다. 오피오이드 중독이 빈곤층을 중심으로 전염되는 절망의 병이라는 의미다.

오피오이드 오남용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 시절부터 국가 지속성을 흔드는 문제로 취급되기 시작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017년 10월 오피오이드 위기와 관련해 ‘공중보건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주정부 등이 무분별한 오피오이드 제조와 유통의 책임을 물어 제약사들을 고발하면서 현재 미 전역에서 2000여건의 소송이 진행 중이다.



미국에 들이닥친 이중의 전염병

미국 언론들은 이미 국가적 재난인 오피오이드 중독 사태가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악화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지난 몇 달간 지역 봉쇄 조치가 강화되면서 사회적 고립이 심화됐다. 경제 침체는 대규모 실업 사태로 이어졌다. 절망에 빠진 서민들은 다시 마약성 진통제에 기댄다. 오피오이드 위기를 초래한 사회적 조건이 갖춰진 것이다.

지난달 워싱턴포스트(WP)가 약물 관련 응급전화, 검시관들의 부검 결과 등을 추적해 도출한 자료에 따르면 코로나19 창궐 이후 오피오이드 오남용 사례는 단순히 늘어나는 것을 넘어 그 증가 추이가 지속적으로 가팔라지고 있다.

연방정부 프로젝트 ‘약물 오남용 탐지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수집된 구급팀·병원·경찰 데이터에 따르면 미 전역의 약물 오남용 의심자는 지난 3월 전년 동기 대비 18% 증가했고, 4월에는 29%, 5월에는 42% 급증했다. 일부 지역에선 약물 과다복용 관련 긴급 구조 요청이 50% 이상 늘어났다.

설상가상으로 약물 중독 치료센터, 회복 프로그램 등이 셧다운 기간 동안 문을 닫거나 대폭 축소됐다. 수입이 급감하고 정부로부터 재정적 구제를 받지 못하면서 일부는 재정 파탄 직전으로 몰렸다.

일리노이주 시카고 쿡카운티의 한 검시관은 “한 전염병(코로나19)이 이제 시작됐지만 또 다른 전염병은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고 WP에 말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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