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노예, 여자 해방… ‘해방의 복음’으로 일제에 맞서다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의 정신여학교(서울 정신여·중고 전신) 학생 및 교사 시절 학교 본관(가운데 붉은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확인됐다. 김마리아 흉상은 본관과 강의동 사이 회화나무 아래 있다. 본관 뒤 흰 건물이 서울보증보험, 그 뒤가 연동교회다. 아래 흑백 사진은 1912년 찍은 본관이다. ‘언더우드관’으로 불렸으며 400여년 수령의 회화나무가 보인다. 정신여·중고는 1978년 이전하면서 용지를 매각, 개인 소유가 됐다. 새 소유자의 유언에 따라 본관과 강의동·강당(사진 왼쪽), 운동장(주차장) 등이 보존되고 있다.



 
서울보증보험 사옥 안에 있는 김마리아 흉상.
 
서울 보라매공원 안에 세워진 김마리아 전신상.
 
서울 연지동 연동교회 및 정신여학교 초기 사진. 남학교는 경신학교였다.
 
일본 유학 시절 혼자만 한복 입은(두 번째줄 중앙) 김마리아.
 
3·1만세운동 후 체포된 김마리아. 고문당한 흔적이 얼굴에 남아 있다.
 
김마리아 (1892~1944)


서울 연지동 김마리아 흉상은 서울보증보험 본사 사옥 정원에 있었다. 동상 옆으로 500여년 된 회화나무 한 그루가 그늘을 이룬다. 수목 높이 22m, 둘레 390㎝였다.

‘이 수목이 위치한 곳은 정신여고가 있던 자리로 3·1운동 당시 김마리아 선생이 영도한 대한애국부인회의 산실이었던 정신여고가 일본 관헌의 수색을 받을 때 비밀문서와 태극기 그리고 교과목으로 금지되었던 국사교재들을 이 고목의 빈 구멍에 숨겨 고비를 넘겼고 후일 각종 비밀문서를 보존하여 역사적인 자료를 넘기게 한 유서 깊은 수목입니다.’

한편 흉상 좌대 옆에는 서울보증보험 임직원들이 흉상을 건립, 김마리아기념사업회에 기증했다고 음각돼 있다.

2019년 5월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기증된 것이다. 이 일대는 옛 정신여학교 터이다. 그 후신 정신여·중고가 1978년 연지동 교사를 민간에 팔고 서울 잠실동으로 이전하면서 개화기 기독교 여성 교육 현장이 사라진 것이다. 옛 정신여학교는 연동교회와 붙어 있었다. 연동교회 부속 학교로 시작했기 때문이다.

독립운동가 김마리아는 이 정신여학교 학생이었고 졸업 후에는 교사였다. 또 그는 항일단체 대한애국부인회를 이곳에서 출범시켰다.

1906년 황해도 장연군 일명 소래마을 출신 김마리아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다. 아버지 김윤방, 어머니 김몽은 사이에 태어난 세 딸 중 막내였다. 소래의 유지였던 김윤방은 최초 성경 번역자 서상륜 그의 동생 서경조의 전도로 소래교회를 세웠다. 교회 부설 학교가 김세학당(소래학교)이었다.

김윤방이 복음을 접하면서 그의 가문은 기독교 명문가가 됐다. 김마리아의 숙부 윤오는 남대문 제중원(세브란스병원) 앞에 ‘김형제상회’를 세워 독립군자금과 교육운동 자금을 댔다. 막내 숙부 필순은 에비슨 선교사를 도와 의료사역을 펼치다 의사가 됐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지속했다. 고모들 역시 기독교 선각자로 한평생을 다했다. 큰고모 구례는 신한청년단을 이끈 서병호, 둘째 순애는 김규식 박사와 결혼했다. 김마리아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막내 고모 필례(광주 수피아·서울 정신여학교 교장 역임)는 의학박사 최영욱과 결혼했다.

또 큰언니 함라는 우리나라 첫 신학박사 남궁혁(납북), 둘째 미염은 세브란스 출신 의사 방합신과 결혼해 일제강점기 기독 지식인의 역할을 다했다. 김마리아는 기독교교육 가운데 성장했다. 소래학교에서 게일, 펜윅, 에비슨, 매켄지 등으로부터 한글, 성경 도설, 구약발췌, 지리, 천자문, 작문 등을 배웠다.

그러나 김윤방이 김마리아 세 살 때 별세하고, 어머니마저 1904년 죽자 그는 큰 숙부 김윤오 보호로 제중원 앞 ‘김형제상회’에 달린 집에서 살았다. 김필순이 제중원 안 사택에서 살던 때였다. 김형제상회에는 안창호 등 서북의 독립운동가들이 드나들었다. 소녀 마리아가 제중원에 놀러 가면 교회(훗날 남대문교회) 마당이 놀이터였다. 그리고 김마리아는 고모 김필례가 다녔던 연동여학교(정신여학교 전신)에 진학했다. 그 학교에서 1908년 밀러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에비슨 선교사(세브란스병원장)를 아버지처럼 따랐다.

이러한 배경의 그는 예수께서 대속해 우리에게 자유와 권리를 줬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조선전통문화와 역사를 가르친 교사 김원근(1870~1944)의 민족교육은 훗날 그가 대한애국부인회운동을 펼치는 데 사상의 근간이 됐다. 김마리아는 성경 과목을 가장 좋아했다. 예수는 남과 여, 장애와 비장애인, 노인과 어린아이 등 누구도 차별하지 않았다고 배웠다. 언더우드는 그 무렵 정신여학교 본관 ‘언더우드관’을 준공했다.

김마리아는 졸업 후 광주 수피아여학교 교사를 거쳐 일본 히로시마여학교로 유학한 뒤 정신여학교 교사로 부임했다. 김필례는 조카를 위해 늘 기도했고 자신이 재학 중이던 동경여자학원으로 또 다시 유학하도록 했다. 유학 중 김마리아는 노예 상태의 조선을 더 확실히 인식했다.

‘현대 문명의 특징은 해방이라 합니다. 정권 해방, 직업 해방, 노예 해방, 학문 해방, 여자 해방 등등. 오늘날 문명의 갱신이라 하겠습니다.… 먼저 사람을 만들고 다음에 여자를 만듦이외다.…’(잡지 ‘여성계’ 1917년 12월호)

그러면서 “하나님의 속성은 모든 것을 바깥에, 즉 넘어서는 초월성에 있다”며 ‘해방의 복음’임을 역설했다. 도쿄 유학생 사이에 김마리아의 주장은 흐름을 주도했고 2·8독립선언과 3·1만세운동의 배경이 된다. 그는 황에스더(황애덕) 노덕신 박정자 등과 청년학생운동의 선두에 선다.

2·8독립선언 후 그는 독립선언서를 안고 광주 춘천 서울 등을 돌며 3·1만세운동 전면에 나선다. 여자단(女子團·대한애국부인회 전신)을 통한 사회운동이었다. 결국 그는 도쿄에 이어 또다시 체포돼 혹독한 고문을 받는다. 그때 발병된 증상으로 한쪽 가슴을 잃었다. 1919년 7월 서대문형무소에서 가석방된 김마리아는 10월 19일 정신여학교에서 한국 여성독립운동사 및 여성운동사의 획을 긋는 대한애국부인회를 출범시킨다. 하지만 이 운동으로 이듬해 또 체포된다. ‘(대구형무소의) 김마리아는 (고문과 중병으로) 살아남지 못하겠더라’고 당시 동아일보가 보도했다.

그해 일제의 징역 5년 구형 논고.

‘…여자로서 대학까지 졸업하고 일본 연호를 모른다 하고… 일본 제국이란 것은 없고 일본 신민이 아닌 태도를 지녔다. 대역무도한 무리로… 조선 사람으로 독립운동하는 것 당연한 일 아니냐 남자가 활동하는데 여자가 활동하는 것도 당연한 일 아니냐고 답한 것만 보아도 범죄의 증거가 확실하다.’

오직 ‘해방의 복음’을 붙들고 망명을 거듭해 가며 질풍노도의 삶을 살았던 김마리아. 그는 1944년 3월 평양기독병원에서 생을 마감한다. 해방 한 해 전이였다.
 
연보

·1906 정신여학교 입학
·1912 일본 히로시마여학교
·1910~1914 수피아·정신여학교 교사
·1915~1921 동경여자학원 수학
·1919 2·8독립선언 및 3·1만세운동 서대문형무소 수감, 대한애국부인회 회장
·1920 대구형무소 수감
·1921~1932 상해 임시정부·미국 망명
·1932~1944 신학교 교수·장로회 여전도회장·교회여성운동

글·사진=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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