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태풍 바비가 제주도를 지나 북상하고 있었다. 전국이 강력한 태풍 피해를 우려해 초긴장 상태였다.
그 시각. 전북 정읍시 태인면 매계리 매계교회 하늘은 먹구름이 잔뜩 끼어 흐렸을 뿐 태풍의 영향권에 놓이지 않은 상태였다. 습하고 무더웠다. 매계교회를 중심으로 한 중산마을, 하산마을, 상산마을을 둘러보았다. 3개 마을 어디서건 매계교회 예배당 십자가가 보였다. 아직도 종을 치는 교회고, 주민들은 종소리를 듣는 것으로 평안을 얻는다. 하지만 빈집이 많았다. 개들만 컹컹댔다.
이 3개 마을 신작로에 호남전기기술교육원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1900년대 초 바로 이 기술교육원 자리에서 3000여명이 모여 부흥회를 했다. 호남 각지에서 일용할 양식 보따리를 맨 그리스도인이 몰렸다. 동학농민혁명군 지도자 출신 최중진 목사가 전하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였다.
최중진은 허우대가 건장하고 웅변에 뛰어났다. 최씨 세보는 최중진이 당시 정읍군 보림면 매계리(1914년 태인면으로 흡수됨) 출생이라고 전한다. 동학농민운동 발원지 전북 고부군이라는 이설도 있다. 호남전기기술교육원은 보림초교가 폐교된 자리이고 보림초교는 매계교회 원 터 및 부설 학교 터에 설립됐다고 전해진다.
최중진은 동학농민운동이 관군, 청·일군에 진압된 후 1899년쯤 스스로 호남선교 7인의 선발대 중 한 사람인 테이트(한국명 최의덕) 선교사를 찾아가 어머니, 동생 광진(훗날 전주서문교회 장로) 대진(제주 및 북간도 전도 목사)과 함께 입교한다.
그는 동학농민혁명 발발시 천주교 초기 신자였다.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그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우월 의식과 특권 의식, 권위주의에 반발해 개종(뮈텔 대주교 기록)했다. 아무튼 테이트로서는 귀한 지도자를 얻었다. “당신의 생명은 하나님이 보호해 주셨으니 3형제가 제가 전하는 기독교를 믿고 나를 도와 달라”고 말했다.
당시 매계리는 보림면 면 소재지가 있던 큰 마을이었다. 최중진이 테이트 선교사의 조사가 되어 매계교회를 설립하자 금세 부흥했고 그는 매서인 겸 영수가 됐다.
1901년 8월 해리슨(하위렴) 선교사는 ‘예배 출석자가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집 한 채를 사서 회집 장소로 개조했고 그들은 20리 떨어진 곳에 가 예배를 드린다’고 전주선교부에 보고했다. 최중진의 아내 김선화가 중생 체험을 한 후 폭발적 부흥이 이뤄지자 테이트는 ‘제일 오래된 교회로 가장 유망하다’고 기록을 남겼다.
탄력을 받은 테이트는 최중진을 1904년 평양신학교에 입학시킨다. 최중진은 김필수 윤식명과 함께 이 학교 2회 졸업생이 됐다.
프레스톤(변요한) 선교사의 목포 대사경회 기록은 ‘최중진은 열렬한 기도를 통해 참석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며 ‘설교만큼이나 능력 있는 기도자’라고 표현했다. 그의 영성 가득한 기도는 화산 분출과 같은 특별함이 있었다고 한다. 매계교회는 1906년 최중진을 장로 장립했다. 당시 예배당은 500여명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대형교회였다.
최중진은 교회 개척에 누구보다 열성적이었다. 고부 구중교회, 태인 화호교회, 정읍교회(정읍제일교회)와 천원교회, 고창 흥덕·동호·신촌교회, 부안 관동·진성동교회 등을 설립해 나갔다. 전북 서남부는 당시 드물게 조선인 사역자에 의해 부흥했다. 그는 매계교회 안에 매계학교를 두었듯 개척 교회마다 강습소를 두어 기독교 교육에 힘썼다.
한데 이 열정의 사역자는 1910년 돌연 미국남장로회 조선선교부로부터 목사직에서 제명당한다. 한국인 목사 제명 1호였다. 이유는 배은, 배약, 분쟁, 몰지각, 불복이었다. 앞서 그해 1월 최중진은 전주선교부 전라대리회에 참석해 교회생활 규율 완화, 부안 지방 등 선교지 이양, (사역지) 중등학교 설립, 교회의 구휼 강화, 선교 재정 지원 확대 등을 주장했는데 이것이 선교사 눈밖에 난 것이다. 테이트 선교사와의 갈등도 배경이 됐다. 최중진은 “선교사의 특권·우월 의식, 권위주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등 정신에 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선교사들은 처음 당하는 일에 반교회주의라고 분노했다. 제명당한 최중진은 ‘대한예수교자주회(자유교회) 목사 최중진’이 되어 전북 서남부 교회를 중심으로 맞섰으나 미국남장로회의 재정 지원이 각 교회에 끊기면서 매계교회조차 1914년 폐쇄되고 말았다.
이후 최중진의 자유교회 사건은 마치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과 같이 전개됐다. 그간 한국교회사는 선교사 중심 텍스트여서 그에 관한 연구와 평가에 인색하다. 재평가가 필요하다. 최중진은 자유교회 쇠락 이후 목회 현장을 떠나 백정 인권운동인 형평사, 자치운동 신간회, 소작쟁의 문제 등을 다루는 조선노동공제회 등 지역사회운동을 주도했다.
하지만 그는 어디까지나 기름 부음 받은 자였다. 부흥사 김익두 목사가 1930년 봄 정읍지역 부흥회를 이끌 때 ‘심령이 녹아날 듯하여 견딜 수 없었다’며 개심했다. 당시 ‘기독신보’는 ‘(최중진이) 통회한 후 장로교회로 돌아와 역사하게 되었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전주서문교회 복귀를 준비하던 중 지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별세했다. 매계교회는 1929년 복원됐다. 지금은 설립자 최중진 목사를 기념하는 비석이 교회 마당에 세워졌다. 그의 자주교회 기치는 훗날 한국기독교장로회 및 진보 기독교 사상과도 맥이 닿는다.
농촌교회 매계교회는 80여명이 출석하는 자립교회다. 최중진에 대해 ‘반(反)선교사’라는 서구 관점의 프레임을 걷어 낼 때가 됐다. 매계교회는 우리가 순례해야 할 역사교회다.
정읍·고창=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