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 최악의 산불이 미국 서부 지역을 집어삼키고 있는 가운데 기후변화가 미 대선의 새로운 이슈로 부상했다. BBC는 “미국 대선 캠페인 기간 동안 거의 논의되지 않았던 기후변화 문제가 미국 서부해안에 번지는 격렬한 산불로 인해 주목받고 있다”고 14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이날 산불 현장인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를 방문한 트럼프 대통령은 매클레런 공항에 도착한 직후 화재 원인을 민주당 주지사들의 산림 관리 부실로 몰아붙였다. 그는 “몇 년 동안 마른 낙엽들이 땅에 깔려 있으면 이것들은 화재의 연료가 된다”고 주장했다.
이는 미국 호주 등 세계 곳곳에서 이례적인 규모로 산불이 발생하는 이유가 이상고온, 가뭄 등 기후변화 때문이라는 전문가들의 주장과 배치된다.
트럼프 대통령은 산불 브리핑에 나선 웨이드 크로풋 캘리포니아주 천연자원부 장관과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크로풋 장관이 “우리가 과학을 무시하고 현실을 회피하면서 산림 관리가 모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캘리포니아 주민들을 보호하는 데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날씨가 점점 시원해지기 시작할 거다. 지켜보자”라고 답했다.
이에 크로풋 장관이 “과학이 당신 의견에 동의하기를 바란다”고 반격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사실 나는 과학이 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과학을 무시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CNN방송은 “기후변화 위기를 인정하지 않는 트럼프 대통령의 태도는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일관성을 유지해 왔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허리케인 ‘로라’ 피해를 입은 루이지애나주 방문에서도 “로라와 같은 재해가 기후변화로 인해 더 빈번해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누가 알겠는가. 이 지역에서 가장 큰 폭풍은 1800년대에 발생했다. 진짜 원인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대꾸했다.
많은 과학자들이 “코로나바이러스의 확산 속도를 늦출 수 있는 방법”이라고 권고했던 마스크 착용에 대해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오랜 기간 ‘적대감’을 드러냈다고 CNN은 덧붙였다.
콜로라도대 화재 과학자 제니퍼 발치는 트럼프 대통령의 낙엽 발언에 대해 “정말 화가 난다”면서 “산림 관리는 이 문제의 잘못된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스탠퍼드대학의 기후·산불연구자 마이클 고스는 “기온이 섭씨 1도 올라가고 강수량이 30% 줄어들면서 지난 40년 동안 가을에 화재가 발생하는 것이 두 배 이상 늘었다”고 말했다.
조 바이든 민주당 대선 후보는 트럼프 대통령을 “기후방화범”이라고 비판했다. 바이든 후보는 자택이 있는 델라웨어주 자연사박물관 앞에서 한 연설에서 “서부 지역이 말 그대로 불타고 있는데, 트럼프는 집과 마을이 불탄 사람들을 탓하고 있다”며 “그가 두 번째 임기를 맞이한다면 지옥 같은 사건은 더 자주 일어날 것이고, 더 파괴적이며, 더 치명적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워싱턴포스트(WP)는 “이날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그간 코로나19와 경제 위기, 인종차별 문제가 지배하던 대선 이슈에 기후변화를 본격적으로 등장시켰다”고 보도했다.
AP통신은 “코로나19에 이어 산불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을 위협하고 있다”고 분석했고, CNN은 “트럼프 대통령은 몇 주 동안 산불에 대해 침묵하다가 이제서야 화재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하지만 산불에 대해 언급함으로써 바이든 민주당 후보와의 차이를 각인시켰다”고 짚었다. 미국에선 8월 말 시작된 서부 산불로 이날까지 최소 35명이 숨졌다. 캘리포니아·오리건·워싱턴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산불이 발생해 남한 면적의 20%에 달하는 약 2만234㎢가 불에 탔다.
임세정 기자, 워싱턴=하윤해 특파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