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역에 내려 북쪽 초량역 방향으로 700m만 가면 삼일교회가 나온다. 부산보훈복지회관과 호텔 건물 등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이 교회는 1951년 10월 14일 설립됐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해 옥고를 치른 소위 ‘출옥 성도’ 한상동(1901~1976) 목사와 그를 따르는 성도들이 모여 시작한 판자촌 예배당이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측 모태 교회이기도 하다.
한상동의 부인 김차숙 사모는 남편의 십자가 고난을 함께 짊어진 여인이었다. 1939년 5월 한상동은 윤술용 등 목회자 10여명과 부산 수영해수욕장에서 수양회를 갖고 일제의 신사참배 거부를 결의했다. 부산 용두산 자락만 해도 5~7개의 신사가 있었다. 일경은 즉각 보안법 위반 등을 이유로 구속했다. 한상동은 1941년 7월 중범죄자로 분류돼 평양형무소로 이감됐다. 김차숙은 담대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출옥 성도’로 불리는 신사참배 거부 수감자들의 대모가 돼 갔다. 1980년대 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민가협)와 같은 성격이었다. 단지 기도 모임이라는 것만 달랐다.
김차숙은 독립운동 명문가 김두천가의 딸이었다. ‘말모이’의 한글학자 김두봉, 초대 국회부의장 김약수(본명 두전)가 삼촌이었다. 이 두 사람은 기장장로교회에서 정의와 민족주의에 눈을 떴다. 광복군 김원봉과도 먼 인척이었다. 김차숙의 고향 기장(현 부산 기장군)의 친인척 대개가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 매 맞고 옥살이를 했다.
김차숙 또한 기장여자청년회 운동에 힘썼다. 한 독립운동가가 옥중에서 병을 얻어 출옥한 지 며칠 만에 사망한 것을 슬퍼한 제문 ‘구수암’에 그의 이름이 대표로 올라 있다. ‘슬프다 나라 잃은 설움이여… 독립을 되찾고자 애국함도 죄가 되니 분하고 원통한 죽음이여’라고 탄식했다. 이런 김차숙과 결혼한 김해 다대포(부산) 출신 한상동도 평생 어떠한 우상과도 타협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북 분단의 과정에서 김씨 가문 세 사람은 북을 택했다. 그리고 6·25전쟁 후 월북 가족에 대한 연좌제가 적용됐다. 김두천가가 연좌제를 피할 수 있었던 것은 한상동이라는 장로회 출옥 성도 지도자가 사위인 데다 당시 3녀 1남 모두 교회를 섬기고 있었던 점이 작용했다.
앞서 1938년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안이 가결됐다. 한국교회의 훼절이었다. 그 무렵 한상동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초량교회 전도사를 거쳐 마산 문창교회로 부임했다.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협박이 노골화됐다. 교회 안에도 그들과 타협하자는 제직자들의 입김이 거셌다. 신사참배 거부 운동은 경남의 한상동, 전남 손양원, 평남 주기철, 평북 이기선, 만주 한부선(헌트 선교사) 등을 중심으로 전개됐다. 경남은 마산의 최덕지, 거창 주남선, 함안 이현속, 남해 최상림, 통영·삼천포 조수옥 등이 나섰다. 그리고 그들은 갇혔다. 전국적으로 2000여명이 투옥되고 50여명이 순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과 함께 마지막 출옥한 이들은 20여명 중 17명이 평양형무소에서 출옥했다. 이 가운데 한상동 최덕지 이기선 조수옥 주남선 이인재 주기철 최상림 이현속 등이 경남권 인물이었다.
부산·경남지역 기독교역사 연구자 최수경(친일기독교청산연구소 준비위원장)은 “신사참배 거부 성도들의 순교와 헌신은 독립운동임을 국가가 인정해야 한다”면서 “이에 반해 신사참배를 독려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한 목회자들의 뿌리가 오늘 한국교회에 이어지고 있는데 이를 청산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모할머니(김차숙)는 이곳 약방과 잡화점에서 옥바라지 물품을 준비해 평양까지 가셨어요. 천 리 가까운 먼 길이었어요. 저희 조부모님(조명규·김인숙)과 웅천교회 교인 등 성도들, 그리고 함안 마산 등 수감자 가족들이 가져온 것들도 있었어요. 같이 수감된 주기철 목사님 고향이 웅천이고 웅천교회에서 성장하셨거든요. 명주 솜옷과 삼베옷 등 짐보따리가 많았어요.”
지난달 24일 창원시 진해구 웅천중로 한 삼거리에서 김차숙의 조카 이선화(58·부산 송도제일교회) 권사가 옥바라지 물품을 준비하던 장소를 가리켰다. 김차숙의 여동생 김인숙이 웅천 사람 조명규와 혼인했고 그 부부의 딸이 조영진(91·이근삼 전 고신대 총장 부인) 사모다. 전날 부산에서 만난 조 사모는 “(이모 김차숙이) 옥바라지 물품이 모자라면 약방과 잡화점을 했던 우리 집에 오시곤 했는데 그때 가족 모두가 눈물과 기도로 준비했다”며 “내가 그때 열두어 살이었는데 평양으로 떠나는 이모의 짐을 우리 형제들이 나르곤 했다”고 증언했다.
기독교판 민가협 대표 김차숙은 매달 평양을 오가다시피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신사참배 거부로 투옥된 평양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의 사모 오정모, 역시 같은 이유로 투옥된 안이숙(‘죽으면 죽으리라’ 저자)의 어머니 등과 수감자 면회를 하고 고문에 항의했다. 그러나 나라를 빼앗긴, 신앙의 자유를 박탈당한 백성에게 인권은 없었다. 이현속과 최상림이 옥사했고 조수옥 최덕지 등 여성 수감자는 봉두난발의 수치를 감내해야 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옥 안에서 하루 2~4회 예배를 봤다. “일본 왕은 신이 아니다. 회개하라. 하나님이 조선 백성을 해방하실 것이다.”
“외가에서 이모님과 같이 지냈는데 솜옷을 만들다가 한숨지으며 우시곤 했어요. 밤이 되면 하나님과 정말 씨름하는 기도를 하시는데 몸을 좌우로 크게 흔들며 머리를 벽에 박으시며 밤새 기도하다 새벽에 잠들곤 하셨어요.”(조카 조용해 장로 증언·뉴욕 든든한교회)
김차숙은 부산에서 평양으로 이감되기 직전 잠시 풀려난 최덕지 목사를 집으로 모시기도 했다. ‘김차숙 집에서 감사의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렸다. 원근 각지에서 성도가 위로하러 왔다. …모두가 눈물을 글썽였다.…한 목사가 도경 감방에서 평양형무소로 압송되어 가고 없을 때였다.’(최덕지 증언)
이현속과 최상림이 순교했다. 김차숙은 큰 장독 하나를 평양 산정현교회 마당에 두었다. 교인들은 밤새 장례에 필요한 물품들을 순사 몰래 독에 갖다 두었다. 그때 김차숙과 옥바라지 사모 간의 묵시.
‘누가 와서 목사님을 달라 하면 머리카락 한 올도 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장차 조선교회를 위하여 목사님을 순교 제물로 달라 하니 우리는 생명까지 바쳤습니다.’
한상동 목사 연보
·1916년 동래고보 입학
·1921년 김차숙과 결혼
·1928년 피어선성경학교 입학
·1937년 평양신학교 졸업
·1939년 신사참배 반대로 문창교회 사임
·1940년 신사참배 반대로 구금·고문당함
·1945년 평양형무소 출옥 및 산정현교회 담임 부임
·1946년 고려신학교 설립
·1951년 초량교회 사임 및 삼일교회 설립
·1971년 고신대 초대학장
부산·창원=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