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호사로 일하면서 이 땅에 와 있는, 그리고 중국 등 제3국에서 유리(流離)하는 탈북민의 삶을 보듬고 싶습니다.”
서울고검 송무부장을 마지막으로 지난달 검사직을 내려놓은 최기식(51) 법무법인 산지 파트너 변호사가 검찰 내부망 ‘이프로스’에 남긴 사직 인사 중 일부다. 검찰 내 ‘북한·통일 전문가’로 꼽힌 그가 19년 4개월간 몸담은 검찰을 떠난 건 통일 준비에 본격 나서는 ‘인생 3쿼터’에 뛰어들기 위해서다. 변호사로 새출발을 한 그를 지난 5일 서울 서초구의 법인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탈북민 변호 등에 집중키 위해 대형 법무법인 대신 현 법무법인을 택했다. 이유는 “통일을 준비하려면 저와 같은 가치를 가진 작은 법인에서 자유롭게 움직이는 게 나을 것 같아서”다. 법무법인 산지엔 북한 인권 개선 등에 힘쓰는 사단법인 ‘크레도’가 있다.
인생 3쿼터는 언제부터 준비한 걸까. 그는 “제 신앙과 관련 있다”며 인생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경남 밀양 소작농 가정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가난 탓에 부모는 초등학교를 마치지 못했고, 누나와 형들은 청소년기에 취업전선에 나섰다. 무엇보다 어린 그를 힘겹게 한 건 가정불화였다. 부모의 다툼이 심한 날엔 교회를 찾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 첫발을 들인 교회는 그가 마음껏 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최 변호사는 “인생이 서글퍼 교회서 울다가 마음이 정갈해지면 찬송가를 부르면서 집에 왔다”고 회상했다.
‘공부 잘하면 부모님이 덜 싸울 것 같아’ 막걸리 냄새 풍기는 엄마 옆에서 공부했던 그는 고려대 법대에 입학해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시험 결과는 썩 좋지 않았다. 1차 시험을 연달아 4번 낙방했고 합격선에 근접한 점수도 얻지 못했다. 입대 전 마지막 시험을 앞두고 정신적 지주인 매형이 급사했고, 여자친구는 시험 일주일 전 이별을 고했다. 그래도 울부짖으며 기도하면서 시험을 준비했고 1994년 처음으로 1차 시험에 붙었고, 이듬해 2차 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이때 삶의 목표를 입신양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삶’으로 바꿨다. 구체적인 목표는 사법연수원에서 발견했다. 최 변호사는 “‘무엇으로 당신을 섬길까’ 기도하던 중 95년 연수원에서 통일법학회를 접하고 ‘민족과 나라를 위해 통일을 준비하는 법조인’이 되리라 결심했다”고 했다.
그는 검찰에서 북한·통일 관련 주요 보직을 대부분 거쳤다. 독일 뮌헨에서 1년간 연수하고 2년간 주독 한국대사관 법무협력관을 지내며 통일조국의 청사진을 그렸다. 2006년 서울중앙지검 공안부 검사로 간첩 사건을 다루며 북한에 대한 이상적 시각을 교정했다. 일심회 간첩단 사건을 맡았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최 변호사는 오랫동안 묵비권을 행사하던 총책을 위해 서울중앙지검 지하주차장에서 기도한 끝에 자백을 받아냈다. 법무부 통일법무과장 시절엔 개성공단 상사중재위원회 남측대표로 개성공단에서 북한 법조인들과 회담했다. 그는 “13년간 통일 관련 부서에서 일하며 소명을 확신했지만, 검찰은 사법질서를 세우는 곳이지 통일 준비를 하는 곳은 아니었다”면서 “보직을 옮길 때마다 하나님께 ‘지금 떠나야 합니까’라고 물었다”고 말했다.
2016년 서울중앙지검 형사5부장 시절 아우디폭스바겐코리아의 배출가스 조작사건으로 성과를 냈을 땐 내심 ‘검사장 승진’을 기대했지만 이내 마음을 접었다. 그는 “보통 검사장이 안 되면 안쓰럽게 보는 주변 시선이 있다”며 “저는 오히려 홀가분했다. 검사장의 꿈이 아닌 통일의 꿈을 가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약속의 땅 벧엘에서 할 일이 있기에 기쁜 마음이었다”고 말했다.
최 변호사의 향후 목표는 ‘열정과 전문성을 가진 공무원, 학자들과 함께 통일이 쓰나미처럼 다가온다 할지라도 항해할 수 있는 크고 튼튼한 방주를 짓는 것’이다. 기회가 있다면 한 번 더 공직자가 돼 통일 조국의 기틀을 세워보고 싶다는 꿈도 있다. 가장 간절한 소망은 삶을 마감하기 전 한반도 통일을 보는 것이다. 그는 “통일 준비는 다음세대를 위해 우리 세대가 꼭 해야 하는 일”이라며 “그래야 두 눈을 감을 때 26세 때 통일 한국의 소명을 주신 하나님께 드릴 말씀이 있을 것 같다”며 미소지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