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내가 고통당할 때 어디에 계시는 걸까?”
우리를 근심케 하는 질문 중 하나다. 특히 죄 없는 사람들이 무참히 죽어갈 때, 힘없는 사람들이 고통에 신음할 때, 정의가 패하고 불의가 승리할 때 주님은 어디 계시느냐고 부르짖게 된다.
‘복음주의 최고’의 영성 작가로 불리는 필립 얀시(71·사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시험하는 주제 중 하나인 ‘고통’과 아무 조건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에 주목하며 글을 써왔다. 고통과 은혜. 어찌 보면 어둠과 빛, 죽음과 생명처럼 상반된 단어로 읽힌다. 그러나 얀시의 관심은 고통 속에 임재하는 하나님 은혜의 성찰이었다.
저서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왜 이러세요’ ‘고통이라는 선물’ 등은 마치 아물지 않는 오래된 상처를 쓰다듬는 듯하다. 그러나 이어지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어메이징 그레이스’ ‘은혜를 찾아 길을 떠나다’ 등은 결국 은혜 안에서 인생의 답을 구하는 얀시의 영적 순례길을 따라가게 만든다.
고통, 그 의미에 대하여
1977년 출간한 그의 첫 책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는 철학적이거나 신학적인 고통 대신 인간이 겪는 고통이라는 문제를 좀 더 현실적이고 구체적으로 접근했다. 얀시는 책에서 고통은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본래 계획의 일부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게 아니라 고난 중에 일어나는 속량적 변화 때문에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내 고통을 능가하는 심한 고통을 겪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나는 고통의 힘에 대해 놀랐다. 고난은 신의 존재를 부인하도록 만들 수도 있지만 반대로 강화된 신앙을 만들 수도 있었다.”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중)
얀시는 국내 기독 출판계에 ‘얀시 열풍’이 불 정도로 크리스천들이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고 목회자도 아니다. 다른 영성 작가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또 하나의 렌즈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저널리스트로서의 시선이다. 얀시는 청소년 잡지 ‘캠퍼스 라이프’의 편집자를 시작으로 미국 복음주의 대표 잡지 ‘크리스채너티투데이’ 편집인을 역임하며 20년 넘게 저널리스트로 일했다.
그의 기독교 작가로서의 본격적인 도약은 의료선교사이자 세계적인 외과 의사 폴 브랜드(1914∼2003)를 만나면서다. 폴 브랜드는 20년 동안 인도 선교사로 사역하며 한센병 환자를 위해 헌신한 인물로 필립 얀시의 영적인 스승이다. 얀시는 그와 ‘육체 속에 감추어진 영성’ ‘나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손길’ ‘고통이란 이름의 선물’ 등을 공저하며 고통이라는 비밀의 세계에 입문한다. 폴 브랜드가 인체에 대한 신비한 정보를 제공하고, 얀시가 영적인 내용을 적용해 정리했다. 책의 집필 과정은 인간의 고통에 대해 깊이 고민하던 필립 얀시를 기독교 작가로 헌신하게 했다. ‘인간의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해줬기 때문이다.
얀시는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출간 후 한 독자의 편지를 받았다. “제 아이는 심각한 장애를 앓고 있고 저도 우울증과 끊임없이 싸우고 있습니다. 기도는 내 감정적 고통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배신감마저 듭니다.”
기도로 해결되지 않는 현실의 문제들이 그에게 또 다른 질문을 하게 했다. ‘이 땅에 자행되는 비참한 일들에 하나님은 신경이나 쓰시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정말 중요한 존재로 여기시는가.’ 그는 이에 대한 답을 예수님의 생애를 연구하면서 찾았다. 예수님의 탄생 배경, 성장 과정, 가르침, 죽음과 부활을 관찰자의 눈으로 탐구한 내용을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에 담아냈다. 그 결과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서 자신의 얼굴을 보여 주셨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예수님은 욥이 고난을 겪던 먼지 나는 땅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짧고도 험난한 생애를 직접 겪으셨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잠깐 우리와 같은 눈으로 세상을 보셨다.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란 욥의 질문에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으셨지만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심정이신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 형언 못할 고통을 지닌 세상에 합류케 하셨다. 그래서 더 느리고 덜 극적인 해답에 착수하셨다.
“예수님이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다. 하지만 죽음을 피하실 수 없었다. 이때 내가 끊임없이 던지는 ‘하나님은 과연 우리를 신경 쓰시는가?’란 질문을 예수님도 하셨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너무 지나친 걸까? 사실 그 암울한 시편에서 예수님이 인용하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는 질문이 바로 그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예수님도 고통당할 때 나와 비슷하게 반응하셨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위로가 된다.… 예수님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오 주님 당신을 위해 고난 겪도록 선택해 주셔서 감사드린다’고 기도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슬픔 두려움 버려진 느낌 절망이 서서히 다가오는 것 같은 처절한 감정을 체험하셨다. 견디셨다. 왜냐하면 우주의 중심에 그분의 아버지가 살아계심을,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든 여전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랑의 하나님이 살고 계심을 아셨기 때문이다.”(‘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중)
복음의 핵심, 은혜
얀시는 세상은 “정의와 공평이란 잣대, 다양한 규칙으로 움직이지만, 예수와 하나님 나라는 은혜로 움직인다”고 역설하며 은혜의 독특함을 설명했다. 그가 말하는 은혜란 명성과 권력, 부를 좇는 세상 풍조와는 정반대다. 은혜는 산상수훈(마 5∼7장)에 등장하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으며 의를 위해 핍박받는 자가 복된 자’라는 선언이다. 은혜는 또 탕자의 비유가 보여주는 것처럼 집 밖으로 나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이다. 값없는 용서를 말한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에서 얀시는 “왕이 잘못하면 신하가 벌을 받는 것과 달리 기독교 신학은 종이 잘못하면 왕이 벌을 받는다”면서 “은혜란 주는 이가 친히 값을 치렀기에 값이 없다”고 말한다. 그는 대표작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쓰면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정면으로 돌파한다. 이후 왕성한 저작 활동을 통해 일약 세계 복음주의권의 저명한 작가로 자리매김한다. 이후 그의 책들은 35개국 언어로 번역됐고 2000만권 이상이 출간됐다.
얀시는 재난이나 참사가 있는 곳을 많이 다녔다. 하나님이 있다면 이토록 비참한 상태로 내버려 두지 않았지 싶은 곳들이다. 그는 “왜 하나님은 히틀러나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이 그토록 엄청나게 해를 입히도록 그냥 두는가?” “왜 하나님은 인류 역사에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가?”란 질문은 열린 질문이며, 하나님은 그 답을 우리에게 맡기셨다고 말한다. 세상 앞에 실효성 있는 신앙을 보여주도록 부름을 받은 것이 우리라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글로 쓴 ‘신앙’이 현실에 부딪히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싶었다. 그 답을 ‘은혜를 찾아 길을 떠나다’에서 이야기한다.
그는 총기 난사 사건이 일어난 버지니아 공대에서 전 세계에서 보내온 연민과 연대의 메시지를 목격했고, 인종갈등으로 피 냄새를 풍기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보복이 아닌 화해의 정치를 보았으며, 각국의 성매매 여성들이 모인 자리에서는 그들의 자활을 돕는 여성들도 함께 만났다. 또 정부도 제공하지 못하는 의료 서비스를 베풀며 가난한 이웃을 돕는 단체들, 정부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무섭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의 교회들, 영적인 면을 존중하며 알코올 중독을 이겨내고 있는 AA 회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들이 하나님의 답이었다. 고통이 있는 곳에 메시아가 있었다.
얀시는 교회가 해야 할 일은 고난과 재난이 있을 때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한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교회만이 할 수 있는 기능이 바로 은혜를 베푸는 것이라고 말한다.
얀시는 기독교 신앙이 다른 종교와 차별화되는 것은 오직 은혜라고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놀라운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들이다. 이런 은혜의 강이 우리를 통해 이웃에게 흘러가고 있는가를 그는 묻는다. 은혜의 강이 흐르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책임이란 것이다.
이지현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