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홍콩 국가보안법 시행을 놓고 충돌했던 중국과 영국이 ‘방송 전쟁’을 벌이고 있다. 중국 정부는 춘제 연휴인 지난 12일 0시부로 영국 BBC의 국제뉴스 채널인 월드뉴스 방영을 금지시켰다. 영국이 런던에 유럽본부를 둔 중국국제텔레비전(CGTN)의 방송 면허를 취소한 지 일주일 만에 내놓은 맞불 조치다. 중국 관영 매체는 방송 금지에 더해 기자 추방 가능성까지 언급하고 있다.
두 나라 간 방송 전쟁 배경에는 BBC의 우한 코로나19 다큐멘터리와 신장위구르자치구 내 집단 성폭행 증언 보도가 있다. 중국은 이를 가짜뉴스로 규정하고 전면전을 벼르는 분위기다.
유럽연합(EU)을 떠난 영국은 미국과 밀착해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존재감을 키우려 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중국과 마찰도 잦아지는 모습이다. 오는 19일(현지시간)에는 영국 주도로 주요 7개국(G7) 화상 정상회의가 열린다. 동맹국과 함께 대중 압박 정책을 펴겠다는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 출범 이후 처음 열리는 다자 정상회의다. 영국은 미국, 일본, 호주, 인도 4개국이 참여하는 다자안보협의체 ‘쿼드(Quad)’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BBC 보도가 방송 전쟁 도화선
BBC는 지난 2일(현지시간) 신장의 재교육 수용소에서 집단 강간과 성 고문 등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수용소에 갇혔다 풀려난 위구르족 여성들은 중국인 남성이 여성 수용자를 데려다 전기충격기로 고문하고 집단 강간했다고 증언했다. BBC는 중국 당국의 취재 제한 탓에 이런 증언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어렵다고 전제하면서도 증언자들의 이동 기록 등을 비교한 결과 선후 관계가 맞는다고 설명했다.
BBC는 이에 앞서 중국 후베이성 우한 의사들이 코로나19의 심각성을 알고 있었지만 중국 당국 압박에 이를 알리지 못했다는 내용을 담은 다큐멘터리도 내보냈다. 새해 들어 중국이 핵심 이익으로 여기는 신장 문제와 코로나19 중국 책임론의 근거인 우한 은폐설을 집중 조명한 것이다.
중국 외교부는 근거 없는 보도라며 강력 반발했다. 이에 영국의 방송 규제당국인 오프콤은 지난 4일 중국중앙(CC)TV의 영어 방송인 CGTN의 방송 면허를 취소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CGTN이 중국 공산당 지휘하에 운영돼 영국 방송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다. 그러자 중국 국가라디오·텔레비전총국(광전총국)은 BBC 월드뉴스 채널 방송 금지로 맞대응했다. 이에 더해 향후 1년간 BBC의 방송 허가 갱신을 위한 어떠한 신청도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BBC는 루머 공장으로 전락해 의도적으로 중국에 먹칠을 했다”며 “BBC 방송 중단 결정은 중국이 가짜 뉴스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주장했다.
홍콩 공영방송 RTHK도 중국 광전총국의 결정에 따라 BBC 방송 중계를 끊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중국이 특정 개인이나 언론 조직을 겨냥해도 홍콩에는 그들을 위한 공간이 있었다”며 “이번 사건은 언론과 관련해 ‘일국’만 있을 뿐 더 이상 ‘양제’가 존재하지 않음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미 국무부도 중국 비판에 가세했다. 미 국무부는 “중국의 BBC 방영 중단을 강력히 규탄한다”며 “중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통제가 심하고 억압적이며 자유가 없는 공간”이라고 밝혔다. 미 국무부의 비난 성명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통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발표됐다.
중국이 서방 국가 언론과 마찰을 빚은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중국은 지난해 미국과 전방위 갈등을 겪으면서 뉴욕타임스(NYT)와 워싱턴포스트(WP) 등 주요 매체에 중국 내 운영 현황을 신고하도록 했다. 또 일부 기자들의 기자증을 회수하는 사실상의 추방 조치도 취했다. 미 국무부가 중국 주요 매체들을 외국사절단으로 지정한 데 따른 대응 조치다. 외국사절단으로 지정되면 미 국무부에 인력 및 자산 현황을 보고해야 한다.
중국 네티즌들은 14일 미 CNN 중국 특파원이 신장 관련 보도를 하면서 위치를 잘못 내보내자 “신장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인권 운운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CNN은 해당 보도에서 중국 영토의 6분의 1을 차지하는 신장 지역을 광둥성에 있는 다른 신장 마을로 표시했다.
D10 추진하는 英, 中과 곳곳 마찰
올해 G7 의장국인 영국이 19일 개최하는 화상 정상회의는 오는 6월 잉글랜드 남서부 콘월의 휴양지에서 열리는 G7 대면 정상회의의 전초전 성격이 짙다. 화상회의의 의제는 코로나19 백신 보급과 감염병 조기 경보 시스템 구축 등이 될 전망이다. G7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캐나다, 일본이 참여하는 회의체다.
영국은 한국과 호주, 인도를 G7 정상회의 게스트 국가로 공식 초청한 상태다. 영국은 G7을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D10 협의체’로 확장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 역시 취임 첫해 민주주의 정상회의를 개최하겠다는 구상을 밝힌 바 있다. 바이든 대통령의 민주주의 정상회의는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지만 기본 틀은 반중 모임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은 미·영이 주도하는 다자주의를 표방한 집단 정치, 특정 국가에 대한 견제 움직임에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있다.
권지혜 베이징 특파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