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영덕에서 체포된 후 수백명과 함께 결박된 채 대구형무소로 끌려갔습니다. 뒤따라 오며 우는 가족에게 돌아보면서 ‘나를 위해 울지 마라. 나는 지금 사도 요한이 가는 밧모섬으로 가는 길이니 우는 대신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발은 부르트고 가도가도 태백산맥 오르막길이었습니다.”
한국성결신학의 확립자이자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설립자 영암 김응조 목사. 그는 1919년 경북 영덕에서 3·18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체포돼 대구형무소에 갇힌다. 앞서 그는 그해 3월 1일 오전 8시 남대문역(서울역) 시위에 참여했다. 당시 서울에는 4곳의 전문학교 즉, 연희·보성·감신·경성신학교가 있었는데 이들 학생 80여명의 연합 시위였다. 김응조는 경성신학교 2학년이었다.
그는 이날 신학교 기숙사(서울 충정로)에서 새벽에 일어나 “하나님 조국을 긍휼히 여기소서”라고 기도했다. 남대문역의 기독 청년들은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파고다공원(탑골공원) 방향으로 나갔다. 남대문을 지나자 후발대가 벌써 일경에 진압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김응조를 비롯한 선발대도 이내 헌병대에 막혔다. 김응조 일행은 추격을 피해 신학교 가까이에 있는 합동 프랑스영사관 앞으로 몰려가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파리평화회의에 조선의 독립 요구를 반영해 달라는 촉구였다. 영사관 외교관들이 시위 학생들을 향해 알았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나 곧바로 일제의 대대적 검거가 시작됐다. 신학교가 강제 휴교당했다. 학교 측은 귀가·귀향을 명했다. 김응조는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고향 경북 영덕군 지품면 낙평리로 향했다.
지난주 영덕~대구 600리 길을 포승에 묶인 채 걸어서 끌려간 선대의 고행 순례길을 더듬었다. 김응조가 영해3·18만세운동을 주도했던 영해(당시 영덕 중심 읍내) 면사무소에서 대구형무소 자리인 현 신덕교회까지 220㎞에 달한다. 영해~낙평리~진보~안동~군위~달성~대구를 잇는 길을 김응조는 십자가를 지고 걸은 셈이다. 태백산맥을 넘는 구절양장 신작로 600리 길이었다. 안동~영덕 구간은 험준한 태백산맥이 가로막고 있다. 황장재를 넘어야 낙평리가 나온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엘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듯 걸었다”고 했다.
김응조는 고향 마을에서 그리스도인들과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한강 이남에서 천안 유관순, 군산 김병수, 영덕 김응조 3인의 젊은 기독 학생들이 3·1만세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킨 주역이다.
사실 김응조의 3·1운동 활약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연구 미흡이 아닐까 싶다. 태백산맥 동네 영덕 낙평리는 대낮인데도 사람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한데 이 한적한 시골 마을에 교회가 3곳이다. 이 중 낙평장로교회와 구세군 낙평영문은 100년이 넘는 역사교회다. 자립과 미자립의 경계를 오가는 농촌교회다.
하지만 1919년 전후 낙평동교회(장로교회와 구세군교회로 분립)는 신앙과 민족 운동의 중심이었다. 예수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이 몰렸고, 교인들은 예수의 삶을 널리 가르치기 위해 계몽운동을 펼쳤다. 서당 소년이었던 김응조는 교회에서 신학문을 접했고 대구 미션스쿨 계성학교로 나가 공부했다.
김응조와 고향의 그리스도인들은 영해 장날을 기해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했다. 구세군 참위 권태원, 낙평동교회 영수 김혁동, 기독 청년 김세영 등과 함께였다. 그들은 낙평리에서 50㎞ 떨어진 영해 장날 영덕 교회 지도자들이 중심이 돼 거사키로 했다. 한데 요시찰 인물 김응조는 거사 전 체포돼 영덕 병곡면 병곡주재소에 갇히고 말았다. 그런데도 ‘약한 자 힘주시는’ 주님을 의지한 물결은 장날 거사를 이뤄냈다. 영해주재소가 파괴됐고 병곡주재소 옥문이 열렸다. 시위 군중에 쫓긴 순사들은 총을 들고 산으로 도망갔다.
시위가 격렬해지자 일제는 인근 울진과 포항의 헌병대를 투입했고, 이도 안 되자 대구 주재 군대를 진압군으로 보냈다. 일제의 총검에 8명이 숨지고 16명이 다쳤다. 시위 참여자에 대한 대대적 검거가 시작됐고 김응조도 다시 붙잡혔다. 무자비한 폭력이 이어졌다. “그때는 살아날 희망이 없었습니다. 나는 체포된 수백명 속에서 엎드려 ‘주여 우리를 보호해 주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때 ‘안심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요 16:33) 하는 주님의 위로 음성이 들렸어요”라고 회고했다.
그는 영해에서 대구형무소로 끌려가며 낙평리 신작로를 지나야 했다. 낮은 초가지붕 굴뚝에는 밥 짓는 연기가 없었다. 낙평동교회 예배당 십자가 위로 먹구름만 잔뜩 끼어 있었다. 한 줄에 엮인 사람이 30명이었다. 그들은 겁에 질려 울면서 황장재를 향해 걸었다. 일경의 채찍이 가해졌다.
대구형무소 3평(9.9㎡) 감방 안에 30명씩 갇혔다. “만세꾼 놈들, 칼로 목을 싹싹 베도 시원찮다”는 협박이 쏟아졌다. 양재기에 굶어 죽지 않은 정도의 밥이 주어졌다. 하루 한두 사람이 죽어 나갔다. 그해 9월 김응조는 재판을 받았다.
“독립(운동)의 이유는 무엇인가?” “독립은 인간의 양심 요구이다. 노예와 독립 어느 것을 원하느냐 물으면 판사께서도 독립이라 말할 것이다.”
그에게 4년이 구형됐고, 주재소 구류로 폭행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증명돼 최종 1년 6개월 형이 선고됐다. 그리고 선물처럼 주어진 해방. 김응조는 거짓 선지자들의 비신앙과 반애국적 처사에 비분강개했다.
“일본 사람들에게 따귀 한 대 맞아보지 못한 애국자, 독립 만세 한 번도 불러보지 못한 자칭 독립지사의 시국 강연, 신사참배에 열중한 변태적 애국자가 표창을 받는다. 그들 도배가 출세하고 진짜 애국자는 초야에 묻혀서 기한(굶주리고 헐벗음)에 싸우고 있다. 이것이 해방 한국의 현상이다.”
3·1운동 102년이 된 지금도 거짓 선지자가 십자가 꼭대기에 있다. 그의 고향 낙평리에는 2019년에야 비로소 ‘3·18만세운동 발상지 비’가 들어섰다. ‘김응조’ 등이 이제야 그 비(碑)의 그 석판에 새겨졌다.
김응조 (1896~1991) 연보
·1910~16년 계성학교 수학·1917년 경성신학교 입학
·1919년 3·1운동 참여 및 수감
·1920년대 안성·아현교회 등 시무
·1930년 목포교회 시무·신유 체험
·1938년 신사참배 거부
·1957년 성결교회 총회장
·1962년 성결대 설립
·1977년 독립유공자 대통령 표창
영덕·대구=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