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 두 아이를 키우는 주부 주은재(41)씨는 ‘까다로운 소비자’다. 주씨는 GMO(유전자변형농산물) 식품은 사지 않는다. 계란을 살 때는 난각 번호를 확인해서 ‘케이지 프리’(밀집 사육으로 생산되지 않는 축산품) 제품 위주로 산다. 유기농 제품을 선호하지만 너무 비싼 경우엔 최대한 국산 제품 중에서 고르려고 한다. 주씨는 “가족들과 신선하고 건강한 음식을 함께 먹는다는 것뿐 아니라 바르게 생산된 제품을 찾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며 “건강한 식생활을 꾸려가기 위한 나름의 원칙”이라고 말했다.
원산지 넘어 품종까지 살핀다
요즘 소비자들은 주씨처럼 까다롭다. 품질, 가격, 제품의 생산 배경, 브랜드 이미지, 제조사의 경영 환경까지 제품 하나를 둘러싼 여러 환경을 꼼꼼하게 따지는 소비자가 적잖다. 품질 대비 가성비가 괜찮아도 브랜드 이미지가 개인의 가치와 맞지 않으면 사지 않는다. 소비의 선택지가 다양해지고 대체품이 넘치다 보니 제품이 담고 있는 ‘가치’는 그만큼 중요해졌다.
까다로운 소비자들을 설득시키려면 유통사나 제조사도 그에 걸맞은 노력을 해야 한다. 최근 유통업계가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분야는 ‘신선식품’이다. 그 가운데 ‘국산 품종’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고 있다.
과거의 소비자는 제품의 가격과 눈에 보이는 신선도를 중시했다면 요즘의 소비자는 원산지를 함께 살핀다. 제품에 대한 정보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어디에서 개발한 어떤 품종인지에 대한 설명도 제품에 상세하게 적어놓는 경우가 늘었다. 유통업계의 공략 지점이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4일 유통업계에 따르면 대형마트 업계는 소비자의 로컬푸드에 대한 관심이 커진 상황에 농가와의 상생으로 시너지를 내기 위해 국산 품종 육성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롯데마트는 지난해까지 41종의 국산 품종 농산물을 선보였고, 올해는 본격적으로 ‘K품종 육성 프로젝트’를 가동하기로 했다.
국산 품종으로 시장을 장악한 대표적인 상품은 딸기다. 늦가을부터 늦봄까지 과일 시장을 평정하고 있는 딸기의 경우, 최근 4~5년 사이 국산품종의 시장 지배력이 압도적으로 올라갔다. 국산 딸기 품종을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전인 2005년에는 일본 품종의 점유율이 86% 정도였다. 하지만 2005년쯤부터 품종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고 설향, 킹스베리, 아리향, 금실 등 신품종이 다양하게 개발되면서 국산 품종 점유율이 95%에 이르게 됐다.
대형마트, 편의점 등 유통업계가 적극적으로 마케팅에 나선 것도 국산 품종 점유율을 끌어올리는 데 한몫을 했다. 이마트는 당일 새벽에 수확한 설향 딸기를 그날 판매하는 ‘새벽에 수확한 딸기’라는 이름을 붙여 신선도를 강조한 판매로 큰 호응을 얻었다.
개발부터 유통까지 ‘쉬운 길 없다’
새로운 품종을 개발해 전국 단위의 유통에 성공하기까지는 긴 호흡의 준비와 노력이 필요하다. 누구도 성공을 완벽하게 예견할 수 없으므로 모험이 되기도 한다.
2014년 개발된 ‘군산 꼬마 양배추’는 국내 판로를 2019년에야 확보하게 됐다. 1㎏ 정도로 작은 크기에 식감이 부드러운 군산 꼬마 양배추는 군산농업기술센터가 수출용으로 개발했으나 내수 판로는 마땅히 확보하지 못했다. 기회는 품종 개발 5년 뒤에야 찾아왔다. 지역 우수 농산물을 발굴하기 위해 출장 중이던 권희란 롯데마트 MD(상품기획자)의 시선에 닿으면서다.
당시 군산농업기술센터 김상기 계장은 “소형 농산물을 선호하는 소비 변화에 맞춰 새로운 품종을 개발해 2014년 재배를 시작했으나 국내엔 판로가 없었다”고 어려움을 털어놨다. 권 MD는 “소용량으로 잘라 파는 양배추의 매출 추이가 꾸준히 증가하는 트렌드가 다져지던 시기”라며 “맛과 식감이 측면에서도 소형 양배추가 차별성이 있다고 확신해 신상품 운영을 결정하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해에는 코로나19로 수출 시장의 판로가 막힌 상황에서 국내 유통이 꼬마 양배추 재배 농가에 큰 도움이 됐다.
롯데마트가 계약재배하고 있는 ‘블랙위너수박’도 모험이 성공으로 이어진 사례다. 겉껍질은 검은빛이 돌고 과육은 선홍색으로 아삭한 식감을 가진 블랙위너수박은 전북 완주 농가와 롯데마트가 계약재배하는 국산 품종 상품이다.
블랙위너수박은 2018년 경남 창원에서 시범 재배한 뒤 호평을 받으며 상품화를 시도했다. 품질과 가능성을 확인한 종자사 ‘농우바이오’는 이듬해 농가 파트너를 찾아 나섰으나 새로운 품종 재배에 흔쾌히 도전하겠다는 농가를 쉽게 찾지 못했다. 날씨, 토양 등의 여건이 맞지 않아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하면 1년을 망치는 결과를 내기 때문이다.
전북 완주 삼례농업의 농가 16곳이 수박 명산지가 아님에도 모험적인 도전에 나서면서 도약의 기회가 왔다. 좋은 품질, 삼례농협의 농가 관리와 지원, 농가의 정성, 롯데마트와 계약재배를 통한 안정적인 유통 환경 확보가 맞물리면서 성공적인 국산 품종으로 자리 잡게 됐다
이마트에서 판매되는 ‘라온 파프리카’도 주목할 만한 제품이다. 라온 파프리카는 네덜란드,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3번째로 개발한 미니 파프리카다. 보통의 파프리카는 중량 200g 안팎에 당도가 6~7브릭스 수준인데, 라온 파프리카는 중량 50g 정도에 11브릭스의 당도를 낸다. 식감이 좋고 단단해 저장성도 뛰어난 제품으로 평가받는다. 이마트에서 매년 판매율이 두 자릿수 신장세를 보이며 파프리카 판매 비중의 1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K-스타 양파’는 농촌진흥청이 종자사업 GSP를 통해 개발한 고품질의 국산 양파 종자다. 양파 종자의 80% 이상은 원산지가 일본인데, 일본산보다 영양은 높고 가격은 저렴하다. 지난해 이마트에서만 300t 이상 팔리며 큰 인기를 모았다.
일본이나 중국 불매운동처럼 소비자운동이 활발하게 펼쳐지면서 국산 품종에 대한 관심이 확산된 측면도 있다. 직장인 백모(38)씨는 “딸기 귤 양파처럼 자주 먹는 과일이나 채소를 사면 일본으로 로열티가 지급된다는 걸 알게 된 뒤 국산 품종인지 아닌지 따지는 습관이 생겼다”며 “비슷한 맛이고 가격 차이가 심하지 않다면 이웃 농가도 살릴 수 있는 국산 제품을 사려고 한다”고 말했다.
문수정 기자 thursd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