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암울한 시대 태어난 ‘산토끼’ 민족 계몽의 심장을 깨우다

국민동요 ‘산토끼’ 작사·작곡자 이일래 선생 흉상. 경남 창녕군 이방초등학교 교정이다. 이일래 선생은 1920년대 말 이곳 교사로 근무하면서 나라 잃은 슬픔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산토끼’를 작곡했다.
 
이일래 (1903~1979)
 
1936년 12월 14일 크리스마스이브 성극 직후 기념사진. 문창교회로 추정.
 
1970년대 경기도 남양주 거주 시절 이일래 부부. 제자들에게서 온 편지를 읽고 있다. 여성동아 제공
 
1970년대 이방초교 교정. 지금은 학교 주위로 체험 및 기념 시설 ‘산토끼 동산’이 마련됐다. 여성동아 제공
 
이방초교 제4회 졸업식. 앞줄 맨 오른쪽이 교사 이일래이다.
 
조선기독교서회가 발간한 ‘조선동요작곡집’과 수록곡 일부. 당시로선 드물게 칼라 표지이다. 앤 뉴·에스모니 뉴 선교사 부부가 영역과 삽화를 맡았다. 서구에 보내진 동요집이다.
 
이일래 외아들 이명학 명신무역 대표는 매년 이방초교에 장학금을 수여한다. 졸업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경남 창녕군 우포늪에서 북서쪽으로 2㎞쯤 가면 얼룩덜룩 채색한 이방초등학교 교사를 만나게 된다. 학생수라야 스무 명이 채 안 된다. 면 소재지 학교인데도 소멸 위기다.

1928년 이 학교에 스물다섯의 젊은 교사가 부임한다. 경남 마산 대처에서 미션스쿨 창신학교 초중 과정을 졸업하고, 서울 중동학교와 연희전문학교에서 공부한 엘리트 기독청년 이일래였다. 그는 연희(연세대 전신)에서 수물과(수학)을 전공했지만 음악적 재능이 남달랐다. 그는 1930년대 이은상 현제명 이흥렬 등과 함께 한국 동요 개척기 선구자였다. 국민 동요 ‘산토끼’가 이일래 대표곡이다.

‘산토끼 토끼야 너 어디 가나/ 깡충깡충 뛰어서 너 어디로 가나/ 산 고개 고개를 나 넘어가서/ 토실토실 밤송이 주우러 간단다’(조선동요작곡집 1938년 경성: 조선기독교서회 발간 5쪽)

이일래는 이방학교 부임 전 호주선교사 아담슨(한국명 손안로)이 설립한 창신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민족교육을 표방한 경남지방 대표적 사립 근대학교였다. 하지만 1920년대 일제가 내선일체를 이유로 기독교교육을 탄압했다. 종교교육이 까다롭게 적용되자 미션스쿨의 재정비 및 폐교가 잇따랐다. 이일래는 이 과정에서 이방학교로 옮기게 됐다. 그가 오지학교까지 가게 된 것은 창신학교 교사 시절 교회 무대에 올린 연극 ‘레 미제라블’ 공연이 직간접적인 이유가 됐다.

‘이일래 각색·연출·감독의 레 미제라블 공연에 창신학교, 의신여학교 학생들이 출연했는데 관중이 교회를 가득 메웠다.…장발장이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총탄에 맞아 비틀거리며 도망한다. 뒤따라 오는 순사들. …이때 임관석 순사가 호각을 불며 “연극 상연 중지”라고 호통을 내렸다. …반일감정을 북돋워 관중을 충동시키려고 계획한 것이라고 단정했던 것이었다. 이로 인하여 이일래 선생은 경찰서에 호출당하여 며칠이나 고문을 당하다가 1개월간 유치장 신세를 지고 나왔다.’(‘창신 90년사’)

이일래는 황국신민 강요 속에서 창가 및 군가로 음악 교육을 받았고 또 가르쳐야 했다. 교회에 가면 시대 상황 탓인지 진혼곡이 주로 불렸다. 서울 천도교당 낙성식 때 한 바이올린 연주자의 음악에 반한 이일래는 2년간 집중적으로 서양음악 교육을 받았다. 그런 그에게 창가와 진혼곡은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그는 도망갈 곳이라고는 하나님 주신 자연뿐이라고 생각했다. 이일래는 마산부에서 칠원·영산·창녕을 지나 이방면에 닿았다. 코장산 정상에 오르면 낙동강과 우포가 그림처럼 펼쳐진 아름다운 곳이었다. 예배당도 없는 동네였다. 이 한적한 동네에서 그는 가져간 성경 시편을 즐겨 읽었다. 아이들에게 복음성가를 가르쳤다.

‘하느님은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로 하여금 푸른 풀밭에 눕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여 주시네.’

이일래 어린이찬송곡 ‘시편 23’. 이방의 푸른 산과 우포의 풀밭에서 영감을 얻어 곡을 붙였다. ‘오빠 생각’ ‘다람쥐’ ‘고향’ 등 많은 그의 동요가 시편의 운율과 우포의 자연에서 비롯됐다.

지난주 연둣빛 푸르름이 가득한 코장산 아래 이방초교. 교정 안은 이일래 흉상과 노래비, 산토끼 조형물과 벽화가 동심을 자극한다. 학교 옆 산기슭에 지방자치단체가 조성한 ‘산토끼노래동산’ 시설이 테마를 이뤘다. 다양한 종류의 토끼 동물원, 동요관, 체험장 등이 생기를 돌게 한다.

하루는 이일래가 장녀 명주를 안고 바로 이 동산 풀밭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는데 숲속에서 뛰쳐나온 산토끼 한 마리가 있었다. 동요 ‘산토끼’ 탄생 배경이다. ‘산토끼’가 발표되자마자 교회를 중심으로 퍼져나가 온 나라 어린이가 부르는 애창곡이 됐다. 식민지 백성 열에 아홉이 문맹이던 시절, 20여만명에 불과한 그리스도인이 나라의 교육과 의료를 사실상 책임지던 시절, 동요 ‘산토끼’는 공부에 흥미를 유발하는 계몽곡이 됐다.

‘내 부모 내 형제 다 버리고 어디로 가느냐 근화반도 그대 사랑 어디로 가느냐.’

독립운동가 공덕귀 전도사(윤보선 전 부통령 부인)는 ‘산토끼’를 개사해 이처럼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순사가 공 전도사를 가두었고 노래 가사 중 ‘근화’를 문제 삼았다. 이 무렵 호주선교부는 이일래의 탁월한 음악성에 감탄, ‘조선동요작곡집’을 내주었다. 그러나 일제는 ‘산토끼’ 곡 등이 민족 교육에 활용되자 전량 압수했다. 훗날 ‘산토끼’ 작사·작곡자가 누구인지도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6·25전쟁 후 대한민국 교과서에 ‘산토끼’가 실리는데 ‘작자 미상’ 곡으로 표기됐다. 1975년 ‘조선동요작곡집’이 우연히 발굴되면서 비로소 인정을 받았다. 이일래는 이 작곡집이 나오기 전까지 자신의 곡이라고 주장한 바도 없다. “…황혼기를 넘어 영원한 세계로 넘어가는데…산토끼가 이 강산에 널리 펴 나가면은 그것으로 만족할 따름이다”고 했다. 이일래 성품이 그랬다.

한편 일제 말 이일래는 호주장로회 마산선교부 통역 업무와 마산 문창교회(당시 주기철 담임 목사) 성가대장으로 봉사하면서 주를 섬겼다. 마산 복음농업실수학교 음악교사와 마산여자가정학교 설립 등을 통해 기독교육에 힘썼으나 강제 폐교 조치로 좌절하고 말았다. 그리고 해방 후 미 군정 방첩부대 CIC 통역을 맡기도 했다.

국민동요가 된 ‘산토끼’는 1978년 이일래 제자들에 의해 이방초교 교정에서 노래비 제막식을 가졌다. 아쉽게도 이일래를 기리는 어떤 시설물에서도 그의 기독교적 음악 배경을 찾을 수가 없었다.

창녕·창원=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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