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여성이 꿈을 펼 수 있도록 교육·의료 양 날개로 새 길을 열다

서울 발산동 이화여대 서울병원 내 보구녀관(한옥). 1887년 서울 정동에 설립된 한국 최초의 여성 전문병원으로 이화학당 설립자 메리 스크랜턴이 세웠다. 정동 보구녀관은 동대문으로 이전, ‘동대문 이대병원’으로 불렸다. 이화의료원은 2019년 이화여대 서울병원 개원과 함께 보구녀관을 복원, 기독교 선교병원의 역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아래 흑백 사진은 초기 보구녀관이다.



 
메리 스크랜턴의 외아들 윌리엄. 어머니와 함께 조선에 들어와 의료 사역에 헌신했다.
 
경기도 수원 매향학교. 메리가 경기 남부 선교 당시 설립했다.
 
1906년 보구녀관 간호원양성학교 졸업자들의 예모식.
 
메리 스크랜턴 (1832~1909)
 
현 서울 정동교회와 이화여고 중간 지점의 ‘보구녀관 터’ 팻말.
 
초기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이화여고(옛 이화학당) 정문과 심슨관.
 
스크랜턴의 상동교회에 관해 설명하는 김종설 민족교회연구소장.


서울 발산동 이화여대 서울병원은 강서 일대 시민의 생명을 지키는 첨단 의술의 현장이다. 2018년 11월 12일 봉헌예배를 올렸다. ‘동대문 이대병원’ 후신이다. 현대 건축미를 뽐내는 이대서울병원 한쪽에 매력적인 한옥 공간이 눈길을 끈다. 132㎡ 넓이의 복원된 보구녀관(普求女館)이다. 한문에 익숙지 않은 젊은세대에는 선뜻 개념이 잡히지 않는 곳이다. 녀관 앞마당에 안내문을 읽고서야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2019년 ‘올해의 한옥상’을 받았다.

보구녀관은 1888년 대한제국 고종 황제가 ‘여성을 보호하고 구하라’는 뜻으로 명명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전문 병원이다. 1885년 의사 아들 윌리엄 스크랜턴(한국명 시란돈)과 함께 입국한 조선 최초 여선교사 메리 스크랜턴에 의해 병원이 시작됐다. 모자는 언더우드, 아펜젤러와 함께 미국 북장로회 및 북감리회로부터 공식 파견됐다. 특히 메리는 이화학당(이화여고·이화여대 전신) 등 수많은 학교 설립을 통해 ‘만인 평등’의 여성 인권을 심었다. 여성에게 이름 석 자마저 주어지지 않던 전근대의 조선이었다.

메리의 흔적은 서울과 인천, 경기도 남부 일대 여러 곳에 남아 있다. 이화, 매향, 달성, 공옥, 매일 여학교를 세웠고 진명, 숙명, 중앙 여학교 설립 및 운영을 도왔다. 또 동대문, 상동, 애오개에 구휼 진료소를 세웠다. 이 진료소가 바탕이 돼 각기 지금의 동대문, 상동, 아현교회가 설립됐다. 특히 상동교회는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안창호 이승만 김구 등 굵직한 근대사 인물들이 신민회(105인 사건)를 조직, ‘민족교회’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른바 상동파이다. 이런 지도자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은행 본점 주변, 즉 당시 달성궁터에 메리가 문을 연 두어 칸짜리 배움터 달성학교와 공옥학교 등이 발전하면서다. 지금도 상동교회는 삼일중학·공고·상고, 협성대 등을 운영한다.

‘종양이 있는 네 살 여자아이가 죽기 직전 병원으로 왔다. 그 부모가 전통 진료 방식의 지시에 따라 아이의 배설물을 종양에 발랐다고 한다.’ ‘화상 입은 소녀가 업혀 왔다. 입원을 권고했으나 그 집 남자들이 내 권고를 듣지 않았다. 아이가 낯선 곳에서 죽는 것을 두려워한 소녀 가족이 데려가 버렸다.’ ‘우리 여학교에서 소녀들의 눈과 혀로 약을 만들고 있다고 소문이 났고 이로 인해 폭동이 일어날 거라고 했다.’ 보구녀관 3대 병원장 로제타 홀이 쓴 일기의 대목이다.

스크랜턴 모자가 조선에 입국해 사실상 왕실 주치의로서 활약하자 고종이 1886년 ‘시병원’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메리는 서울 정동 시병원 4채 한옥 한쪽에 여성전문 진료실을 냈다. 그 진료실이 이듬해 보구녀관으로 독립했다. 그리고 1913년 보구녀관 분원인 동대문 볼드윈진료소와 통합돼 동대문 시대를 열었다. 의료선교사 메타 하워드, 맥길, 홀, 박에스더(김정동) 원장 등으로 이어지면서 발전을 거듭했다. 이들은 메리로부터 신앙적 훈련을 받아 소명 의식을 높였다.

메리는 미 감리회 뉴잉글랜드연회 소속 목사의 딸이었다. 스무 살에 결혼, 외아들 윌리엄을 낳았다. 그러나 나이 40세에 남편과 사별하고 주님만 의지한 채 ‘아들 바보’가 돼 살았다. 윌리엄은 예일대와 뉴욕의대를 졸업한 수재였다. ‘1883년 9월 여성해외선교회에 참석했어요. 참석자 중 어느 귀부인이 미선교지 조선을 위해 선교 기금을 냈어요. 그걸 보고 저의 기도가 시작됐어요. 조선의 부인과 소녀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깨닫게 되길 바란다고 말이죠.’(메리 ‘우먼스 웍 인 코리아’ 1896)

메리가 그렇게 응답을 구하고 있을 때 ‘그 귀한’ 아들과 손녀가 한 달이나 앓아누웠다. 며느리가 시어머니의 조선 선교를 반대하고 있었던 때다. 우환을 겪고 난 며느리는 “어디든 저도 가겠습니다. 거기서 제 뼈도 묻겠습니다”라고 했다. 그때 메리 나이 53세였다. 당시 기준 노년 여성이 오직 주만 의지한 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나라에 간다는 건 목숨을 건 일사각오였다.

조선 초기 선교사들은 대개 20~30대 초반이었다. 그 가운데 ‘유일한 어머니’ 메리가 있었다. 선교지 박해와 풍토병, 본국에 갈 수 없는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선교사들은 메리의 사랑에 힘을 얻었다. 선교사들은 ‘마더’라 불렀고 조선 그리스도인과 일반 백성들은 ‘대부인’(The great lady)이라 칭했다. 그 어머니는 온화했고 모든 일에 희생적이었다.

이화학당을 개설한 후 1888년 선교보고에는 ‘강한 어머니’ 메리의 불안이 잘 나타나 있다. ‘군중이 몰려와 아이들을 유괴해서 돈을 받고 팔아넘긴다며 우리를 죽이겠다고 했다. …우리는 조금도 낙담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서 이 백성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실 것이라고 믿었다.’ ‘어느 날 밤 (선교)금령이 내려져 있는데도 한 여인이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왔다. “매일 와도 되는지요. 허락해 주세요. 좋은 말씀 듣고 아름다운 노래 들을라치면 마음이 가벼워져요”라고 말했다.’

1898년 스크랜턴 모자가 안식년을 얻어 서울을 떠날 때 용산강 하구(원효로 4가) 나루에 수백명이 환송 인파로 나왔다. 당시 신문은 ‘월강송별’이라고 묘사했다. 1909년 대부인이 별세해 양화진에 묻힐 때 조선인 참배 행렬이 3마일(약 5㎞)에 이르렀다. 대한민국은 2009년 한반도 여성 선교는 물론 교육, 보건 등에 공헌한 메리에게 무궁화훈장을 수여했다.

글·사진=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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