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창일의 미션 라떼] 선교사 묘역의 그들이 오늘날 교회를 본다면…

우리나라에서 활동하다 세상을 떠난 선교사들이 안장된 서울 마포구 외국인선교사묘지공원의 모습. 다양한 모양의 묘비가 뒤편의 신식 빌딩들과 대조를 이룬다.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공식 입국한 건 19세기 말의 일이었다. 일본이나 중국보다 훨씬 늦었지만 부흥은 빨랐다. 젊은 선교사들은 건강을 돌보지 않고 헌신했다. 많은 선교사와 가족이 목숨을 잃었다. 언더우드나 아펜젤러 선교사처럼 이름이 알려진 이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선교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존 헤론(1856~1890) 선교사는 1884년 4월 미국북장로교 해외선교부로부터 한국의 첫 선교사로 임명 받았다. 하지만 뉴욕에서 의사 실습을 마치느라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선교사보다 두 달 늦은 1885년 6월 서울에 도착했다. 2년 뒤 제중원 2대 원장과 고종의 시의로 임명 받고 의술과 복음을 전했지만 안타깝게도 1890년 7월 내한 5년 만에 병사하고 말았다. 시신을 빨리 묻어야 했지만 사대문 안에서 외국인을 묻을 곳이 마땅치 않았다. 고종은 양화진의 나지막한 언덕을 하사했다. 지금의 외국인선교사묘지공원이다. 미국북장로교의 첫 한국 선교사이면서 처음으로 이 땅에 묻힌 선교사가 헤론이었다.

사역 기간은 짧았지만 활약은 컸다. 의료선교는 물론이고 한글성경 번역에도 참여했다. 짧은 사역으로 정규 선교사로 기록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의 뒤를 이어 양화진에 묻힌 선교사들이 오히려 그의 열정적인 사역을 추억하게 했다.

‘현대판 바울’로 불리는 존 모트(1865~1955)도 복음의 씨앗을 뿌린 선교의 선구자였다. 1910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선교대회를 이끈 주역인 그는 1907년 2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열렸던 평양대부흥운동을 목격한 경험을 세계 선교사들에게 전했다. 당시 그는 “한국은 동양의 기독교 국가, 예루살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1924년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의 전신인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 창설에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후에도 수차례 한국을 찾아 막 피어나기 시작한 한국 교회의 자립을 도왔다.

노련한 중국 선교사 존 네비우스(1829~1893)가 미국북장로교 본부의 명령으로 한국에 온 건 1890년 6월이었다. 너무 많은 선교사가 갑자기 한국에 오면서 균열이 생긴 선교사들 사이의 질서를 바로잡고 한국선교의 기틀을 세우라는 사명을 받았다. 2주 동안 서울에 머물렀던 그는 20·30대 선교사들에게 ‘토착교회를 키우라’고 강조했다. 이를 위해 ‘자진 전도, 자력 운영, 자주 치리’라는 한국선교의 3대 원칙을 파종했다. 한국인에 의한 복음화를 골자로 하는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이 정책 덕분에 선교 초기부터 한국인에 의한 복음화라는 목표가 자리잡을 수 있었다.

숨은 공로자들의 헌신으로 한국교회는 부흥이라는 선물을 받았다. 하지만 급성장으로 인한 부침 속에 극심한 성장통을 겪고 있다. 교회를 둘러싼 적지 않은 구설을 보면 초창기 선교사들의 수고가 헛된 일이 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선다. 길을 잃었을 때는 지나온 길을 돌아봐야 한다.

톨스토이의 단편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의 주인공은 파홈이다. 그는 드넓은 대지에 자신만의 영역을 표시한 뒤 해가 지기 전 출발지점으로 돌아오면 그 땅을 준다는 제안을 따라 길을 떠났다. 앞만 보고 쉬지 않고 걸어 복귀하는 길이 너무 멀어졌다. 무리하게 발걸음을 제촉해 출발지점에 들어서는 데는 성공했지만 결국 목숨을 잃고 만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죽음만 맞은 셈이었다. 파홈이 욕심을 내려놓고 잠시 뒤를 돌아봤다면 결과는 어땠을까.

“가다 힘들면/가던 길 잠시 멈추고/뒤돌아 보라/뒤에도/아름다운 길이 있고/아름다운 풍경이 있다”. 시인 전병호의 시 ‘가다가 힘들면 뒤를 돌아보라’의 한 대목이다. 역사에서 지혜를 찾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아름다운 길을 회복할 기회는 여전히 남아 있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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