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선대가 심은 믿음의 씨앗, 아들·손자 거치며 거목이 되다

충남 부여군 임천면 칠산침례교회 예배당과 칠산리 마을 풍경. 금강을 끼고 있는 한적한 농촌 교회다. 근대도시 군산과 강경 사이 나루터 마을로 19세기 말 침례교 펜윅 선교사 등에 의해 복음이 전해졌고, 칠산리 향반 장씨 가문 3대가 내륙으로 복음을 날랐다. 15년 전 부임한 조용호 목사가 강경교회·공주교회(현 꿈의교회)와 함께 ‘기독교한국침례회 3대 교회’의 위상을 되찾았다. 아래 흑백 사진은 1918~1949년 무렵 두 번째 예배당.



 
금강권 선교 개척자 펜윅 선교사의 백마를 이용한 전도 행차 모습. 조용호 목사 제공
 
한국침례회 발상지 논산시 강경읍의 강경교회 현재 모습. 초가는 강경교회 최초의 예배지 ㄱ자 교회로 900m 지점 옥녀봉 정상에 위치한다. 2013년 복원됐다.





 
1대 장기영 감로가 아들의 신유 은사에 감사해 기증한 선교선.
 
금강과 초가집을 배경으로 한 칠산교회 성도 기념 사진으로 1950년대로 추정된다.
 
칠산리 주민이 야학 및 빈민 구제에 힘쓴 장일수 목사를 기려 세운 공덕비.


“그들이 나가서 예수의 소문을 그 온 땅에 퍼뜨리니라.”(마 9:31)

충남 부여군 임천면에 칠산리라는 평범한 농촌 마을이 있다. 면사무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국도나 지방도가 지나는 곳도 아니다. 다만 금강과 접해 있다는 것이 유일한 특색이다. 이 마을은 금강 하구 군산항에서 상류를 향해 37㎞ 지점 강 북쪽에 위치한다. 여기서 12㎞를 더 가면 조선 3대 장으로 호황을 누렸던 강경에 닿는다. 개항 도시 군산부와 일제강점기 급성장한 상업도시 강경 사이에 칠산리가 있었다. 칠산리는 너른 평야를 가졌다. 비산비야(非山非野)였던 곳에 둑이 조성되면서 농업 생산력이 증대됐다. 지난 주말 68번 지방도를 벗어나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해발 19m 동산에 시옷(ㅅ) 자형 칠산침례교회 예배당이 한눈에 들어왔다. 100여호 되는 제법 큰 동네다.

1894~1895년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을 전후로 금강 권역에도 복음이 전해졌다. 1889년 내한한 선교사 펜윅(1863~1935)과 미국 침례교 선교사들이 금강 권역과 함경도 원산을 중심으로 순회 전도에 나섰다. 인동 장씨 가(家)는 200여호에 이르는 칠산리의 사족이었다. 독자로 태어난 향반, 장기영은 자신도 독생자밖에 두지 못해 늘 불안했다. 한데 이 귀한 아들 장석천이 정신질환을 앓았다. 장기영은 용한 의원을 찾아 전국을 누볐다.

1901년 무렵 펜윅과 그 수제자 신명균 등이 금강권 전임 사역자 스테드맨의 선교지를 인계받아 지금의 충남 지방 사역을 본격화했다. 이들은 불편한 육로 대신 제물포~군산 간 배편을 주로 이용했고 바닥이 낮은 한선으로, 군산~칠산리~강경~부여~공주 등을 순회했다. 강경교회·칠산교회·공주교회(현 꿈의교회)가 초기 침례회 3대 교회인 이유다.

장기영은 집안 당숙 장교환에게 전도받고 야소교에 호기심을 가졌다. 대처 군산과 강경의 야소교 신자들이 행세깨나 한다는 소식도 향반의 마음을 움직였을 것이다. 야소(예수)를 믿어야 시세에 뒤처지지 않을 거라는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다. 그가 서양 귀신을 믿는다는 소식은 금방 퍼졌고 장기영은 사람들의 비난에 흔들렸다. 1902년 펜윅과 신명균이 공주를 거쳐 칠산 순회 목회에 나섰다. 이때 장기영은 근심거리였던 아들 판순(훗날 석천으로 개명)의 병세를 호소했다. 한학자 출신의 엘리트 신명균은 축사 은사가 강했다. 이들은 판순을 붙잡고 귀신을 쫓아냈다. 초기 한국 기독교의 이러한 영적 승리는 복음 확산의 기폭제가 됐다.

이 치유의 기적을 체험한 장기영은 신분 사회의 특권을 벗어 던지고 기쁜 소식을 온 땅에 전파하기 시작했다. 머슴에게도 예를 갖췄다. 그리고 석천을 신명균과 펜윅에게 맡기고 예수의 종으로 써달라고 간구했다. 펜윅은 자서전을 통해 그들 부자가 1902년 침례를 받았다고 했다. 아마도 금강에서였을 것이다. 한국침례교회사연구소 오지원 소장의 얘기다.

“장석천은 원산의 신명균 집에서 5년간 살며 성경과 한문을 익히고 신앙 훈련을 받았습니다. 명석했던 그는 사복음서와 사도행전 주요 절수를 암송해 ‘걸어 다니는 성구 색인’이라 불렸을 정도죠. 그는 신명균 등이 세운 공주 성경학원의 첫 입학생이며 1906년 교사(전도사)가 됐습니다.”

교사 장석천은 강경·공주 구역에 파송됐다. 펜윅은 “그가 인도하는 부흥회는 ‘우레의 아들’임을 입증한다. …우리는 가는 도시마다 수백 명의 사람에게 예배당과 뜰을 내주고 교회 밖에서 집회 참가자를 맞이해야 했다. …불과 넉 달 사이에 새 교회가 36개가 더 생길 정도로 강하게 사역을 펼치고 있다”고 했다. 장석천은 1910년 전후로 한 ‘백만구령운동’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고 침례회 성장의 동력이 됐다.

한편 장기영은 옛사람을 버리고 온전히 자신을 예수에 맡기고 칠산교회 감로(장로)로 교회를 섬겼다. 그는 선교사들을 위해 선교 배를 헌물했다. 금강변 23개 예비 신자들이 이 칠산교회 나룻배를 타고 성경학습을 다녔다. 요단강에 일곱 번 몸을 담그고 깨끗하게 된 나아만과 같은 삶이었다. 아들 석천이 공부를 마치고 훗날 칠산교회 목사가 됐다.

1930년대 일제의 신사참배와 동방요배 강요가 이어졌다. “천황 폐하도 불신 시 멸망하는가.” “그렇다.” 침례신도들은 이렇게 거침없이 답했다. 일제는 재림과 천년왕국 사상을 고무한다는 이유로 1942년 침례회 지도자 32명을 함흥형무소에 가뒀다. 장석천도 끌려갔다. 회유와 협박, 고문이 이어졌다. 그는 만신창이가 되어 1년 반 만에 병보석으로 출소해 칠산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재수감되어 원산구치소에 갇혔고 5년 집행유예를 받았다. 교단은 강제 해산됐다. 그사이 칠산교회 예배당도 일제에 의해 헐렸다. 그런데도 성도들은 마을 회당을 빌려 예배를 올렸다. 하지만 장석천은 고문 후유증으로 기력을 쉽게 회복하지 못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함께 칠산교회도 재건됐다. 장석천도 교단 재건을 위한 3인 목사가 되어 교단 재건 회의를 칠산교회에서 소집했다. 칠산교회와 장 목사가 교단의 구심점이었다. 그는 온 땅에 복음을 전파하고자 했으나 끝내 고문 후유증을 이겨내지 못했다. 그의 외아들 장일수 목사가 훗날 침례회 총회장 되어 아버지의 뜻을 이었다.

칠산교회 아래 수백 년 된 느티나무가 있다. 그 옆에 좀처럼 보기 드문 ‘목사 공덕비’가 서 있다. ‘장일수 목사는 일제시대 문맹 퇴치를 위해 야학을 열어 주었고, 해방 후 치안 유지를 위해 의열청년단을 조직했으며 빈민구제와 고학생에게 장학금을 제공하셨다.’

부여·논산=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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