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숨이 끊어질 듯한 일제 고문 속 주님을 만나다

손정도 목사가 일제강점기 유배(거주제한) 생활을 했던 전남 진도군청 앞 철마광장. 1912년 손 목사 유배 당시 진도 읍성 안으로 주재소 등이 있었다. 사진의 왼쪽 건물 쪽이 손 목사 유배 터다. 멀리 보이는 교회는 진도중앙교회로 1919년 설립됐다.
 
손정도 목사와 도산 안창호(왼쪽) 선생. 중국 상해 임시정부 시절이다.
 
1915년 진도 읍성 관아와 읍성 거리 풍경. 사진 왼쪽 초가 등이 손정도 목사 ‘정배소’로 추정된다. 오른쪽 모텔 사진은 정배소 자리다.
 
손정도 목사는 진도 유배를 끝내고 서울 정동교회에서 목회하다 망명한다.
 
손정도 목사 부부와 세 자녀. 장남 원일(왼쪽)은 성장해 대한민국 해군 창설의 주역이 된다.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는 한국사의 마지막 유배자 중 한 사람이다. 1912년 11월 손정도·백영엽 목사 등 30여명의 독립운동가는 일제에 의해 섬으로 유배됐다. 일제는 ‘거주제한’ 또는 ‘정배(定配)’라고 표현했다. 손정도는 ‘가쓰라 암살음모사건’ 혐의를 받고 전남 진도에 유배됐다. 같은 혐의의 조성환과 백영엽은 각기 거제도와 울릉도로 유배됐다. 정대호는 어느 섬인지 밝혀지지 않았다. 이들 모두 임시정부에서 활약했다.

부패하고 무능했던 조선 말 왕조는 의병장 최익현(1833~1906)을 일제에 바치고 대마도로 끌려가 죽게 했다. 한국사의 마지막 유배자로 알려져 있다. 손정도는 평남 강서 출신으로 1903년 과거시험을 보러 평양에 가던 중 전도를 받고 하늘나라 신민이 됐다. 이듬해 그는 사당을 훼파하고 평양의 미션스쿨 숭실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1909~1911년 평양 숭실학교·협성성경학원 등에서 수학했다. 또 1912년 1월 미 감리회 서울연회에서 중국 하얼빈 선교사로 파송받아 하얼빈한인교회를 설립, 디아스포라가 된 백성과 만주의 믿지 않는 생명을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는 데 힘쓴다.

그런 그가 그해 하얼빈에서 진도로 유배를 당했다. ‘보안법 조례위반’이었다. 미·일 간 소위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 7월 29일) 사건의 그 가쓰라 다로(당시 일본 내각총리)를 살해하려 했다는 것이다. 가쓰라는 1912년 7월 12~21일 중국 다롄을 통해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서 ‘러·일 밀약’을 맺고 러시아의 몽골 지배를 묵인하는 협정을 맺는다. 가쓰라 일행이 탄 기차가 하얼빈을 통과한 것이 7월 14일이었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역에서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의거를 일으켰던 곳이라 러·일의 경비가 삼엄했다. 그렇지만 소요 없이 가쓰라는 하얼빈을 통과했다.

그러나 불과 일주일 후 손정도·최관홀 목사 등 90여명의 조선인이 체포됐다. 다롄에서는 백영엽 목사가 체포됐다. ‘가쓰라 암살음모사건’은 그렇게 일제에 의해 조작됐다. ‘105인 사건’의 후속 음모였다. 두 사건 모두 기독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한 민족운동 세력 제거가 목적이었다.

손정도는 관동군 헌병대에 결박당해 하얼빈경찰서에 넘겨졌다. 친분이 두터웠던 하얼빈의 러시아정교회 사제가 개종을 권유했다. 개종은 석방과 구금, 살길과 죽을 길의 기로였다. 일제가 신병인수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중국 사람과 조선 형제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파송된 내가 어찌 희랍교로 개종하겠는가.” 신병 인수된 손정도는 남산 조선총감부 유치장에 수감됐다. 모진 고문과 악형이 이어졌다.

‘(손정도) 목사님께 들은바…고춧물을 붓고, 대나무와 가죽 매로 난타하고, 불에 달군 죽침으로 찌르고, 발가벗겨 문밖에 세워 놓고 냉수를 끼얹었다고 한다. …물고문과 비행기고문이 가장 견디기 힘드셨다고 한다.… 몸이 떨리고 이가 갈린다.’(배형식 목사 저서 ‘고 해석 손정도 목사 소전’ 중,1949)

“…견디다 못하여 없는 일이라도 있다고 자백하여 이 연옥의 고초를 면할까 하는 약한 심사도 한두 번이 아녔소. 그러나 양심을 속임은 신앙생활에 금물이라. …그리스도의 이름만 부르짖기를 실로 수없이 하였소.”(훗날 정동교회·배재학당 부흥회 인도 시 손정도 간증)

1931년 ‘기독교 종교교육’ 잡지에 실린 ‘고 해석 손정도 목사 약전’에는 그가 생명 줄이 끊어지는 고문의 순간 주의 임재와 주의 음성을 듣는 성령 체험을 했다고 기록됐다. 일제는 손정도를 두 달간 조사했으나 뚜렷한 혐의가 없었다. 그사이 미국 네브래스카에서 소년병학교를 운영하던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하얼빈의 손정도에게 보낸 편지가 발견됐다. 일제는 이 편지를 이유로 ‘정치에 관한 불온 동작할 우려가 있다’며 손정도를 수감 대신 ‘거주제한 1년’의 유배를 보냈다. 그는 제물포에서 경비선을 통해 진도로 보내졌다.

지난주 진도군청에서 360m 지점 보은모텔. 사우나를 겸한 평범한 이 동네 여관이 ‘독립운동가 손정도 목사’가 위리안치(圍籬安置)된 곳임을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한국기독교사 거목 이덕주 감신대 명예교수의 연구 등에 힘입어 확인된 곳이다. 일제의 공판 기록과 당시 신문 보도에 따르면 진도에 상륙한 손정도 등은 진도주재소에서 조사를 받고 처음엔 읍내 정씨 소유 2칸짜리 정배소에 거하게 된다. 그 정배소에는 ‘105인 사건’에 연루된 평북 의주읍교회 영수와 집사 두 사람이 먼저 와 있었다고 한다.

이 교수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기도와 찬송, 성경 공부 모임을 했고 전도를 했다”며 “이 예배 모임이 성 밖으로 퍼져나가면서 손 목사가 멀리 나가 집회를 인도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진도 읍성에서 5㎞ 떨어진 진도 첫 교회 분토리교회(현 진도초대교회)가 아닌가 추측된다.

손정도는 모임이 활발해지자 주재소 소장 등을 설득해 정배소를 ‘진도면 남동리 528’, 현 보은모텔, 당시 허도종의 집 사랑채로 옮긴다. 진도의 양천 허씨는 서화가 허백련 등 남도예술의 뿌리를 이룬 명문가이다. 그 허도종은 훗날 손정도가 진도를 떠날 때 동행해 그리스도인이 됐다.

“목사님, 함께 밤새우는 줄도 모르고 기도드리던 일, 진도만이 만조 된 동구 밖 멀찍이 나가 ‘동해 물과 백두산’을 높이 부르던 일, 악독 무도한 왜정 고문의 정황을 말씀하시던 일…백절불굴하던 강한 자세를 앙모할 뿐입니다.”(함께 유배당했던 한중전이 1949년 추도식에 참석해 증언한 내용)

유배지에서 처절한 심정으로 애국가를 부른 목사. 그는 유배를 마친 후 동대문교회·정동교회 등에서 목회를 하다 1919년 2월 상주(喪主)로 변장해 중국으로 망명,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으로 활동한다. 그의 아들이 독립운동가이자 대한민국 해군 창설의 주역 ‘손원일(1909~1980) 제독’이다.

손정도 (1881~1931) 연보
·1913년 평양 남산현교회 전도사
·1914~1918년 동대문교회·정동교회 목사
·1919년 상해 망명, 임시의정원 의장
·1921년 임시정부 교통총장
·1920년대 중국 길림서 독립운동
·1928~1929년 길림교회 등에서 목회
·1962 3.1 대한민국 건국훈장 추서

진도·목포=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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