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조선을 사랑한 일본인, 기독 공동체 터전 세우다

전북 고창군 부안면 부안초등학교. 1910년대 일본인 마스토미 장로가 조선인 선교를 위해 오산교회를 세우고, 이어 미션스쿨 흥덕학당과 오산학교(아래 흑백사진)를 설립했다. 현 부안초교는 이 학교가 전신이다. 학교 교정에 1회 졸업생들이 심은 아카시아 한 그루(사진 왼쪽)가 보인다. 마스토미는 1995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마스토미 야스사에몽 (1880~1934)
 
마스토미 부부와 그의 어머니(앞줄). 뒷줄은 마스토미 지원으로 고베신학교에 유학한 조선인 3인으로 추정된다.
 
현 오산교회 인근 옛 오산교회 사택. 1980년대 초 현 위치로 예배당을 이전했다. 오산교회는 1912년 설립됐다.
 
옛 오산농장 입구. 소유주가 바뀌었으나 농장 이름은 그대로다. 멀리 보이는 건물이 부안초교(옛 오산학교)이다.
 
부안초교 교사 맞은편 ‘학교설립기념비’. 가운데 기념비에 마스토미에 의해 설립됐다고 새겨져 있다.
 
현 오산교회 예배당. 일제강점기에서 1980년대까지 지역공동체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예장합동 측 소속 교회다.
 
오산학교 후신 고창고보(현 전북 고창고교) 설립 낙성식 직후 전북 김제 마스토미 자택에서 찍은 참석자 기념사진.


8월 초의 한낮. 전북 고창군 부안면 공립 부안초등학교 교정은 더없이 조용했다. 푸른 하늘이 선명하고 매미 소리만 요란했다. 면 소재지 학교가 전교생 29명이다. 올해 입학생은 1명이다. 이 학교에서 걸어서 10분 거리 오산교회(예장합동·박형관 목사)는 1912년 설립된 ‘100년 교회’다. 70여명의 교인이 있으나 80% 이상이 70대 이상 고령층이다.

이 두 곳은 한국 교회사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장로 마스토미 야스사에몽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세운 학교와 교회이기 때문이다. 마치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배재학당과 정동교회를 설립한 것과 같은 복음의 역사였다. 그는 분명 우리 민족을 침략한 일제의 신민이었으나 삶의 태도는 하나님의 자녀였다. 평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파하는 데 헌신했다. 그는 ‘조선의 형제·자매’라 부르며 이들에 대한 전도, 문맹 타파 교육에 힘썼다. 언제 어느 곳에 있건 ‘조선인을 위한 기도회’를 매월 1회씩 가졌다. 일본 고베 그의 집에는 ‘조선인의 구원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 실현’이라는 기도문을 붙여 놓았다. 그만큼 조선에 대한 부채를 안고 산 그리스도인이었다.

마스토미는 후쿠오카 출신으로 와세다대 상과를 진학했으나 삶에 대한 물음을 거듭하다 학교를 그만두었다. 1904년 러일전쟁에 징집된 마스토미는 12사단 경리행정 장교가 되어 인천에 상륙, 주로 후방에서 물자 조달 업무를 맡았다. 이때까지 그는 예수를 몰랐다. 그런데 전쟁터에서 만난 일본 장교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비통한 심정을 밝히며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이 전쟁의 와중에 평화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라니…’. 마치 다메섹 도상의 사도 바울과 같은 회심의 마스토미였다.

이런 그를 더 신실한 그리스도인으로 이끈 건 부인 데르코(1971년 작고)이다. 미국 선교사에게 영어를 배우며 확고한 신앙을 가졌던 데르코는 1907년 사업가 마스토미와 결혼하며 ‘하나님 영광 드러내는 사업’을 확약받았다. 마스토미는 참전 때 호남평야를 지나며 미곡 사업을 구상했던 걸 진행하고 있었는데 데르코의 인도에 사업 목적을 180도 달리했다.

부부는 1908년 김제 호남평야에 정착해 농업사무소를 열고 자리가 잡히자 기도제목이었던 교회를 세웠다. 오산교회였다. 또 1912년에는 문맹자 교육을 위한 흥덕학당, 그리고 1918년 흥덕학당을 흡수해 중·고등과정에 해당하는 사립 오산학교(현 부안초교)를 인가받았다. 그의 신앙관과 교육관은 명쾌했다. “하나님은 약자와 소외당하는 사람들 편에 서서 그들을 도와주는 존재다.”

당시 호남평야의 쌀 생산은 동양척식주식회사를 통한 수탈 구조였다. 유일하게 마스토미만이 그 수익을 조선인을 위한 기독교 공동체 실현을 위해 농촌계몽사업에 썼다. 마스토미는 무엇보다 지식 없이는 조선의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의 백성 되기 어렵다고 보고 기독교 교육에 심혈을 기울였다.

지금의 부안초교 교정에 100년 수령 아카시아가 지지대에 의지해 서 있다. ‘1924년 1회 졸업생들이 졸업을 기념해 심은 3그루 중 살아남은 한 그루’라는 팻말이 나무의 역사를 말한다. 단순한 이 기록 이면에는 말씀과 기도와 찬송이 배어 있다. ‘오산학교’ 학생과 교사들이 숙식을 같이하며 예수 복음을 민족과 열방에 전하려는 의지의 식수였다. 또 학교 정문에 들어서 오른쪽에 있는 ‘학교설립기념비’(1970)에 이 학교가 마스토미에 의해 시작됐다는 내용이 간략히 거론된다. 서양 선교사들이 교회 학교 병원을 삼자 축으로 했다면 그는 교회 학교 농장을 축으로 삼았다.

마스토미는 신앙 없는 교육은 무의미하다고 보고 기독교 지도자를 양성하고자 했다. 조선 청년 김영구(1887~1928·서울 승동교회 목사) 윤치병(1889~1979·기독교대한복음교회 창설) 양태승(1889~1954·고창고보 설립)과 교유 가운데 이들을 고베신학교에 유학시켰고 이들이 졸업하자 모두를 교사와 목사 등으로 초빙, ‘오산리 선교부’에서 일하게 했다. 마스토미는 훗날 김영구 목사가 승동교회 목회 중 이른 나이에 별세하자 그 자녀들을 위해 매월 10엔씩을 박세라 사모에게 송금했다. 사모는 이를 모아 땅을 마련했고 아들(김종수)을 통해 세운 교회가 서울 중랑구의 영세교회다.

당시 오산교회 예배당 종소리가 울리면 그들은 예배로 하루를 시작했다. 농장 직원들은 마을 앞 느티나무 공터에서 찬송과 기도를 했다. 해 질 무렵 다시 그 터에서 하루를 마감했다. 밀레의 그림 ‘만종’과 같은 날들이었다. “마스토미 선생께선 아침은 마을에서, 저녁은 들에서 기도했다. 소작인과 조선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다.” “그는 우리에게 조선이 독립하기 위해서는 조선인이 뜻을 따라 살 것, 열심히 배울 것, 예수님을 믿을 것이라고 설교했다.”(‘마스토미 추상록’ 중)

그러나 세계 경제공황과 일제의 전쟁 준비로 농장사업이 위기를 맞으며 학교 운영이 흔들렸다. 이때 3인의 제자들은 양태승을 중심으로 민립학교 ‘고창고보(현 고창고 전신)’를 설립해 오산학교를 흡수했다. 초대 교장이 마스토미였다. ‘북의 명문 오산고보(이승훈 설립), 남의 명문 고창고보’란 얘기가 이때 나왔다. 사랑은 국적이 없다.

고창·김제=글·사진 전정희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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