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창일 기자의 미션 라떼] 한국에서도 제2, 제3의 슈나이스가 나와야

파울 슈나이스 목사와 부인 기요코 여사가 2019년 독일 하이델베르크 자택에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와 인터뷰하고 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김찬호 제공




파울 슈나이스 목사는 1958년부터 독일개신교선교연대(EMS) 동아시아 책임자로 일했다. 당시 일본 도쿄에 있던 동아시아 본부는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한 해외 전초기지와도 같았다.

독일에서 74년 조직된 기독자민주동지회와 협력하며 군부 독재에 시달리는 한국의 실상을 세계로 알렸고 민주화를 위해 물심양면의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그 일의 핵심이 슈나이스 목사였다. 그는 80년 5·18 참상을 독일 제1공영방송 도쿄지국에 알려 고 위르겐 힌츠페터 특파원이 광주로 달려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 시절 고 오재식 선생도 도쿄에 사무실을 둔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도시산업선교회 책임자였다. 둘은 한국의 현실을 세계로 알리고 한국의 민주화 세력에 생기를 불어넣기 위해 일본의 대표적 지성지 ‘세카이(世界)’ 편집장과 접촉했다. 그리고 가상의 인물인 ‘티케이생(TK生)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 태어난 게 ‘한국으로부터의 편지’였다. 글에는 군부 정권의 부조리를 조목조목 고발했고 민주화 인사들의 실태를 담았다. 훗날 티케이생이 지명관 도쿄여대 교수로 밝혀졌지만, 당시에는 중앙정보부도 티케이생을 특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지 교수가 처음 글을 쓰기 시작한 73년에는 특별한 직업도 없었다. 그런 그를 위해 오재식 선생과 세계교회협의회(WCC) 직원이던 박상증 목사가 나서 모금을 했다. 이런 노력으로 수년 동안 지 교수의 생활비는 WCC와 유럽교회가 책임졌다. 티케이생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아무도 모르게 했던 일이었다. 빛도, 이름도 없던 시절은 길었다.

이뿐 아니었다. 인권이 사라진 한국의 생생한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슈나이스 목사는 수시로 한국을 찾았다. 입국이 막히면 아내와 딸을 대신 보내 성냥갑이나 과자 상자에 선언문과 사진들을 숨겨 티케이생에게 전달했다.

외국인들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진을 치고 있던 한국기독교회관을 자유롭게 드나들었다. 이곳에는 민주화의 산실인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의 사무실이 있었다.

인터넷도 없고 국제전화도 자유롭게 쓸 수 없던 시절 티케이생이 15년 동안이나 쓴 글이 생방송 수준의 생생한 정보를 담을 수 있던 이유였다. 그 시절 ‘종로5가’를 드나들던 인사들 사이에서는 “마치 목요기도회에 앉아 민주화 인사들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는 것 같은 생동감이 티케이생의 글에서 느껴진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고 한다.

민청학련 사건 등으로 수차례 옥고를 치렀던 안재웅 한국YMCA전국연맹 유지재단 이사장은 “어둡던 시절 한국과 세계를 연결하는 데 세계교회가 큰 역할을 했고 그중에서도 슈나이스 목사 등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며 “모든 게 막혔던 시절, 유일하게 생명 실은 피를 운반했던 혈관이 이 창구였다”고 회상했다.

슈나이스 목사는 지난 24일 5·18기념재단이 수여하는 ‘2021 5·18언론상’을 수상했다. 숨은 공로자가 뒤늦게 인정받은 셈이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민주화된 뒤 70년대 민주화를 위해 목숨까지 걸고 헌신했던 기독교 인사들의 활동이 우리 기억에서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다행히 기독교의 민주화 운동사를 남기려는 노력도 있다. 이 일에 한국기독교민주화운동(이사장 권호경 목사)이 나서 상당한 양의 자료를 수집했다. 모은 자료는 디지털 작업을 거쳐 일반에 공개할 예정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탄압을 딛고 민주화를 이룬 우리나라에서도 ‘제2, 제3의 슈나이스’가 나와야 한다. 이들이 자유를 잃고 신음하는 여러 나라에 새 희망을 공급한다면 그 또한 우리 역사를 오랫동안 기억하고 받은 사랑을 나눌 방법일 것이다. 군부가 집권한 미얀마나 다시 탈레반의 손에 떨어진 아프가니스탄, 자유를 바라는 이들에게 슈나이스와 같은 든든한 이웃이 필요하지는 않을까.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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