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과 NGO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국정원이 과거 내건 유명했던 원훈은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한다'였는데, 어쩌면 저런 슬로건 정도가 두 기구의 활동에서 포개지는 부분일 듯하다. 하지만 많은 이에겐 이런 말도 억지스러운 우스개처럼 들릴 것이다. 그만큼 국정원과 NGO는 완전히 색깔이 다르다. 사람들은 국정원을 언급할 때 정보기관에서 벌이는 일들을 상상하며 서늘한 기운을 느끼게 된다. 반면 NGO를 생각할 땐 봉사자의 따뜻한 손길과 나눔의 뜻을 실천하는 뭉근한 분위기를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여기, ‘국정원 2인자’로 통하는 국정원 1차장을 역임한 뒤 NGO 활동가로 변신한 남자가 있다. 바로 월드휴먼브리지 김진섭(63) 사무총장이다. 그는 어쩌다 정보기관 ‘넘버 2’에서 NGO 살림꾼으로 인생행로를 바꾼 것일까.
지난 8일 경기도 성남 월드휴먼브리지에서 만난 김 사무총장은 “음지에서 일하는 삶을 살아서 인터뷰를 하는 게 너무 어색하다”고 거듭 말했다. 그러면서 “아직도 NGO에 나 자신을 맞춰가고 있는 것 같다. 작은 단체에서 일하면 고민도 작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며 미소를 지었다.
경북 안동 출신인 김 사무총장은 경북고와 경북대를 거쳐 1987년 안기부 공채를 통해 공직에 입문했다. 북한정보단장과 북한정보국장을 역임했고 박근혜정부 시절이던 2016년 국정원 1차장 자리에 올라 이듬해 6월까지 국정원에서 일했다.
월드휴먼브리지 사무총장에 취임한 건 2019년 12월이었다. 월드휴먼브리지는 만나교회(김병삼 목사)가 2009년에 만든 단체로 김 사무총장은 이 교회 장로이기도 하다. 김 사무총장은 “만나교회에 출석하면서 월드휴먼브리지의 활동을 오랫동안 지켜봤다”며 “보람된 일을 하는 곳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
“김병삼 목사님으로부터 월드휴먼브리지에서 일하면 어떻겠냐는 말을 듣고 망설임 없이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저에게 월드휴먼브리지는 낯선 단체가 아니었으니까요. 물론 익숙한 일에서 벗어나 새로운 영역에 도전하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국정원처럼 덩치가 큰 기관에서 오래 일했으니 월드휴먼브리지 같은 작은 NGO에 적응하는 건 수월할 거로 생각했다. 취임 초기에는 ‘한두 달만 지나면 적응하겠지’라며 마음을 다잡을 때도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문제가 쉽게 풀리지 않을 때가 적지 않았다. 김 사무총장은 “거대한 톱니바퀴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돌아가는 단체가 국정원이라면 NGO는 완전히 다른 곳이었다”고 설명했다.
“NGO 활동은 축구랑 비슷해요. 공격수가 수비수를 뚫고 돌진해야 하는데 계속 태클이 들어오고, 누군가의 다리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골을 넣기도 쉽지 않고…. NGO에서 일하는 게 딱 그렇더라고요. 물론 좋은 점도 있어요. 국정원은 거대 담론을 갖고 씨름하는 곳이어서 결과가 바로 드러나지 않거든요. 그런데 NGO는 열심히 하면 성과가 금방 눈에 보일 때가 있어요. 헌신이 곧 결실이 되는 영역이라고나 할까요.”
국내외에 넘쳐나는 NGO 중에서 월드휴먼브리지가 가진 차별점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던졌을 때 김 사무총장은 “단체 이름처럼 우리는 세상의 ‘다리(bridge)’가 돼주려는 곳”이라고 답했다. 그는 “월드휴먼브리지는 높은 곳에 있는 사람들이 낮은 곳으로 건너가 나눔을 실천할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덧붙였다. 이어 “월드휴먼브리지는 본부의 명령을 지부가 이행하는 곳이 아니다”며 “본부와 지부가 평등한 관계에서 일하는 네트워크를 갖췄다는 점도 우리 단체의 특징”이라고 자랑했다.
김 사무총장이 국정원에 근무하던 시절 주로 맡았던 역할은 대북 업무였다. 크리스천으로서 북한선교의 꿈이 클 듯했다. 이런 이야기를 꺼냈을 때 그는 십수 년 전 중국과 북한 접경 지역으로 떠났던 비전 트립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느 날 새벽 그는 잠에서 깨 두만강 강가에 서서 북한 지역을 바라봤다고 한다. 강 저편에는 북한 아낙네들이 물을 긷고 아이들은 물장구를 치고 있었다. 김 사무총장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언젠가 국정원을 떠나게 되면 대북 선교에 뛰어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하나님이 그 길로 나를 이끈다면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다.
“NGO에서 일하면서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마주할 때가 많아요. 성경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적혀 있잖아요. 그런데 NGO는 생색도 내고 선전도 해야 하거든요. 그래야 우리의 뜻에 공감하는 후원자를 모집할 수 있으니까요. 후원자들을 보면서 존경심을 느낄 때가 많아요. 코로나19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계속 후원금을 보내는 분이 많거든요. 월드휴먼브리지는 인건비나 행정비도 최대한 줄이려고 노력하는 단체예요. 그래야 도움이 필요한 곳에 후원자의 돈이 그대로 흘러갈 수 있으니까요.”
성남=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