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1828~1910·아래 사진)는 위대한 작가이자 ‘인류의 교사’였다. 그의 사상은 ‘언어의 씨앗’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심어져 생각의 숲을 만들어 주었다.
톨스토이의 삶은 사실주의 문학 중심의 전반기와 종교사상 중심의 후반기로 나뉜다. 40대 후반 ‘전쟁과 평화’(1869), ‘안나 카레니나’(1877) 등을 발표해 명성을 얻었지만, 내면의 갈등으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냈다. ‘인간은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살아야 하는가’란 질문에 답을 찾아 헤맸다. 결국 그는 신앙을 통해 ‘삶의 목적은 선을 행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 시기에 쓴 ‘고백록’(1879)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까지 유일한 지식이라고 생각해 왔던 이성적 지식 외에도 지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류에게 삶의 의미를 알게 해주어 살아갈 수 있게 해준 신앙이란 지식이었습니다. 신앙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비이성적인 것이었지만 나는 오직 신앙만이 인류에게 삶의 의문에 대한 대답들을 제공해 주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고백록’ 중)
하나님 나라는 내 안에
‘고백록’을 분기점으로 그의 삶은 달라졌다. 50대에 들어선 톨스토이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온전히 믿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변화였지만 그는 성서를 읽으며 그 가르침에 세상 모든 사람이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그 역시 가르침을 삶으로 살아내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그는 기독교의 영성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가난한 사람과 죄인들까지 모두 사랑하며, 폭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복음서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단편소설 ‘사랑이 있는 곳에는 하나님도 있다’는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라는 마태복음 25장 40절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가 회심 후 쓴 ‘부활’(1899)은 기독교 윤리에 바탕을 둔 톨스토이즘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주인공들은 ‘인류가 저지른 끔찍한 죄에서 구원받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방법은 하나님 앞에서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따라서 아무도 벌하거나 개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는다.
톨스토이가 ‘부활’을 완성하기까지는 10년이 걸렸다. 그 시간 동안 톨스토이는 두 남녀 주인공의 문제뿐만 아니라 당대 러시아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까지 작품 속에 흡수시키며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주인공 네흘류도프는 당대 대중에게 기독교 정신으로 각성할 것을 촉구한다. 도덕적 결단을 통해 자신의 영혼을 높은 경지로 끌어올리는 주인공을 등장시킨 것도 계몽을 염두에 둔 것이라 볼 수 있다. ‘부활’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자신이 목격한 그 모든 참상이 어디에서 유래한 것인지, 그것을 척결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제야 분명하게 깨달았다. 그가 여태껏 찾지 못한 해답은 바로 예수가 베드로에게 준 해답과 같은 것이었다. 항상 모든 이를 용서해야 한다는 것. 타인을 벌하고 교정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 죄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용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부활’ 중)
그가 말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우리 안에 존재한다. 이것이 톨스토이 사상의 핵심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1894)에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것을 돕는 일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 개개인의 진실에 대한 깨달음과 선포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다”라고 말했다. 기독교 신앙은 그의 삶에 있어서 중요한 핵심이었다. ‘하나님 나라는 당신 안에 있다’란 제목도 누가복음 17장 20~21절을 인용한 것이다.
산상수훈과 톨스토이즘
톨스토이는 작품뿐만 아니라 자신의 인생 철학도 성경을 통해 완성했다. 특히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을 기본 골격으로 철학적 토대를 완성했다. 톨스토이의 비폭력적 철학 역시 산상수훈에서 건져 올린 것으로 사후 간디,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등에 영향을 미쳤다.
1870년대 후반부터 검소한 생활의 영위, 악에 대한 무저항주의, 사랑의 정신으로 톨스토이즘을 체계화한 그의 근본 신념은 모든 관계를 하나님의 뜻에 조화시켜 하나님을 알도록 하는 것이었다. 즉 선한 인간이 되는 것이 하나님 뜻을 성취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예수님의 명령을 가감 없이 받아들이고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톨스토이가 복음서에서 발견한 윤리적 이상들은 그를 불꽃처럼 사로잡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이상대로 살지는 못했다. 그는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자신이 거느리던 농노들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작품의 판권을 포기했으며 소유지를 나눠주었다. 평민들과 어울려 살기 위해 농부의 옷을 입고 스스로 신발을 만들어 신었으며 밭에 나가서 땅을 일궜다.
정직하게 살며 세상을 개혁하려는 톨스토이의 이런 노력 때문에 집안에는 분란이 끊이지 않았다. 톨스토이에게는 경건을 향해 나가는 방법이었지만 그의 아내 소냐의 눈에는 가족을 방치하고 학대하는 행동으로 보였다. 세계의 주목을 받으며 수많은 제자와 방문객에 둘러싸여 있던 톨스토이가 표방했던 무소유의 개념은 많은 자녀를 키우며 가계를 꾸려나가야 했던 아내의 삶에는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엑스레이 같은 투시력 때문에 자신은 고통스러운 그리스도인이었다. 그의 종교는 궁극적으로 은혜보다는 율법에 관한 것이었고 타락한 세상을 꿰뚫는 하나님에 대한 비전이라기보다는 자기 향상을 꿈꾸는 인간에 관한 계획이었다. 비극은 산상수훈을 또 하나의 율법 형태로 변질시켰다는 비판도 있다.
1910년 10월 28일 새벽, 구도자로서의 자기모순과 아내와의 갈등에 괴로워했던 그는 가출을 실행에 옮겼다. 메마르고 척박한 현대인의 영혼에 따뜻한 위로를 건네길 원했던 그는 가출한 지 열흘 만인 11월 7일, 82세의 나이로 한 빈촌의 간이역에서 생을 마감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가 평생 좇았던 질문이었다. 그는 단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자연스럽게 대답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 대한 걱정과 보살핌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있는 사랑으로 사는 것입니다.…사랑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사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그 사람 안에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곧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중)
이지현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