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가 처음 한국에 세워진 것은 일본인이 부산에 상주하게 되는 17세기 초엽부터라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1609년 일본과의 무역을 재개하는 을유조약이 체결되자, 일본인들이 부산에 상주하게 되고 이들은 항해 안전을 기원하며 신사를 부산진에 세웠다. 이 신사는 1894년 거류지 신사라 개칭되었다가, 1900년에는 용두산 신사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신사가 본격적으로 세워지기 시작한 것은 1876년 강화도조약이 체결된 이후부터다. 일본인들이 개항장에 거주하게 되면서 거류지에 신사를 세워 천조대신과 메이지 천황 등을 숭배했다.
유대인들이 전 세계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가 모인 곳에 회당을 세워 영적 구심점으로 삼았다면,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가는 곳마다 신사를 세워 그들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았다. 한일합병 이전에도 이미 1898년 서울 남산공원에 세워진 태신궁(太神宮, 1913년 경성신사로 개칭)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 42개의 신사가 세워져 있었다. 그러다가 합병 이후에는 전국에 걸쳐 크고 작은 신사들이 건립됐다.
1917년 5월 7일에는 평양에 신사가 을밀대 언덕에 웅장하게 건립됐으며, 1925년에는 5년간의 공사 끝에 한국 전체 신도의 총본산으로 서울 남산에 조선신궁이 세워졌다. 그러면서 일제는 우리나라에도 신사참배를 점점 더 강요하기 시작했다.
기독교에서 신사참배가 크게 문제가 된 것은 1930년대 이후의 일이다. 그러나 이미 한일합병 이후부터 신사참배 강요는 조금씩 이루어졌다. 1913년부터 국공립학교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고 1920년대에는 사립학교들에서도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그런데 그 강요 정도는 시기와 지역마다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신사참배와 연관해 고난 당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05인 사건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어느 무명의 기독교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105인 사건은 1911년 독립군 자금을 모집하던 안명근의 체포 사건을 1910년의 데라우치 총독 암살 미수 사건으로 누명 씌워 평안도 일대의 반일 기독교인들과 신민 회원을 다수 체포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으로 실형을 받은 인물이 105인이기 때문에 신민회 사건은 105인 사건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유죄 선고를 받은 한 피고의 죄목 가운데 이런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정주 신안학교의 교무주임으로… 일본 천황의 최초의 천장절 집회에서 천황의 어진영 앞에서 예배하는 것을 우상숭배 행위라 하여 거절한 단체의 가장 완강한 분자이다.”
이 사람은 이 항목만으로 유죄가 입증되어 7년형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신사참배가 아니라 천황의 어진영에 참배하는 것을 거부한 것이지만, 그 성격은 신사참배와 동일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천황숭배와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형을 받은 최초의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공립학교에서의 신사참배 거부사건도 강경보통학교에서 일어났다. 당시 일제의 각종 국경일과 황실의 행사는 대부분 신도적 행사를 치르는 제일(祭日)과 축일(祝日)로 지켜졌다. 일제는 1924년 10월 11일 강경 신사 제일을 맞아 학생들을 동원해 신사에 참배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당시 강경성결교회 성도였던 김복희 교사와 기독교를 믿는 학생 26명이 행사에 결석했다. 또 그 자리에 참석했던 40여명은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은 강경성결교회 주일학생들이었고 소수가 천주교 신자였다.
이 사건이 사회문제화되면서 기독신보는 물론이고 일반 신문에서도 기사화되었다. 특별히 동아일보는 1925년 3월 18일 사설에서 일본의 조상숭배를 신사에 대한 이해도 없는 한국인 아동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옳지 못함을 지적했다.
그러나 당국은 학부형까지 동원해 학생들을 설득시키려 했고, 김복희 교사와 7명의 학생이 끝까지 거부하자 일제는 결국 김 교사를 면직하고, 7명의 학생에게는 퇴학 처분을 내렸다. 이 사건은 한국에서 신사참배가 최초로 사회문제화되었을 뿐 아니라 최초로 공식적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1920년대까지는 전반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신사참배의 강요나 탄압이 본격화되지는 않았다. 특히 1919년 3·1운동 이후 새로 부임한 사이토 총독은 소위 문화정치라는 이름으로 약간의 유화정책을 시행했기에,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언제나 강압적인 것은 아니었다.
일제는 1925년 조선신궁의 완공을 기념하는 어령대 봉영식과 진좌제에 서울에 있는 기독교계 사립학교들의 학생들을 동원하려고 했다. 그러나 기독교계 사립학교에서 반발이 일어났고 더 강요하지 않았다. 또 일본 관리도 조선신궁을 담당하는 제관의 불만을 살 정도로 신사참배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1930년대가 되자 급변하는 국제 정세와 함께 신사참배 정책에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오창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