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스쿨 중심 갈등 확산… 서울·평양 선교사들 간 의견 불일치

일제는 조선에 내선일체를 강조하고 황국 신민화를 위해 1062개의 신사를 세웠다. 사진은 일제가 당시 서울에 세웠던 경성신사 전경. 서울역사박물관 제공




1920년대는 일제가 소위 ‘문화정치’라는 이름으로 다소 유화정책을 시행하였기에 신사참배 문제에서도 약간의 융통성이 있었다. 특히 당시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는 9명의 역대 조선 총독 가운데 유일한 해군 대장 출신(나머지 8명은 육군 대장 출신)이었을 뿐 아니라 미국에서 유학한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선교사들에 대해 약간 유화적인 정책을 시행했다.

그는 기독교 선교부의 재단법인을 허가하고 세금도 감면시켜 주었을 뿐 아니라 전임 데라우치 총독이 제정한 ‘포교규칙’을 개정해 교회의 설립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고, 기독교계 학교에서 성경 교육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그러자 한국감리교의 감독을 지냈던 웰치 선교사와 같은 사람은 사이토 총독을 ‘기독교 정신의 구현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1930년대에 들어와서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이어지면서부터 급변했다. 국가가 전쟁 상황으로 치닫자, 일본 정부는 더욱더 군부의 입김에 좌우돼 강력한 군국주의로 치달았다.

이때부터 일본 정부는 천황에 대한 충성과 국가의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신사참배를 노골적으로 강요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교회보다는 먼저 학교에서 시작됐다. 1932년 9월에는 평양의 각급 학교에 평양에서의 춘계황령제(春季皇 祭, 3월 21일, 자연을 찬양하고 생물을 소중히 여기는 제일)에 참석할 것을 강요하였고 또한 전국 각급 학교에 신사참배를 명령했다.

그러나 기독교 학교들에서 신사참배 거부 운동이 일어나면서 갈등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1932년 1월 전남 광주에서는 남장로회에서 경영하던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가 만주사변 기원제에 참가하지 않거나 참가하더라도 신사참배를 하지 않아 당국의 엄중 문책을 받았다. 그다음 해 9월에는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비롯한 10여 개의 기독교 학교가 평안남도 지사의 경고를 무시하고 ‘만주사변 1주년 기념 전몰자 위령제’에 참석하지 않아 해당 학교가 시말서를 쓰게 됐다.

이렇듯 갈등이 심화되자 장로교 총회에서는 교섭위원들을 파견해서 기독교 신자의 자녀들이 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기독교 교리에 위반되는 일이니 기독교 학교는 신사참배에서 제외해 달라는 의사를 총독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완강했다. 모든 학교는 조선총독의 교육령에 의해 운영되는 학교인 만큼 신사참배의 예외를 허락할 수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런 가운데 신사참배 문제가 사회적으로 크게 확대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1935년 11월 14일 평양의 기독교계 학교의 교장들이 평안남도 지사의 지시를 거절하고 평양신사에 참배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자 평안남도 지사 야스다케는 도내 공·사립 중등학교 교장 회의를 소집한 후 신사참배에 응하지 않을 때는 교장 파면과 강제 폐교까지 포함된 단호한 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당시 평양에 있던 선교계 학교는 전문학교 1곳, 중학교 12곳, 소학교 60곳 등 재학생만 10만 명이 넘었다. 하나님 계명을 지키기 위해 폐교도 각오할 것인가, 아니면 학교를 지속하기 위해 신사참배에 협조할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해 선교사들 간에는 의견의 불일치가 일어났다. 그들의 입장은 소속 교단이나 사역하고 있는 내용, 그리고 사역의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었다. 서울지역에서 활동하던 연희전문학교 교장 언더우드(초대 장로교 선교사였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장남)와 경신학교 교장 쿤스 등은 신사참배는 종교 행위가 아니라 국민의례와 같으므로 신사참배를 수용하면서라도 미션스쿨을 유지하는 것이 한국교회를 위해 바람직하다고 봤다. 그리하여 그들은 학생들을 이끌고 신사에 가서 신사참배를 시행했다.

그러나 평양에서 활동하던 선교사들의 입장은 달랐다. 그들은 회의 끝에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이므로 그것을 거부하기로 했다. 그러자 일본 당국은 1936년 1월 매큔의 숭실학교장과 숭실전문학교장직 인가를 취소했고, 스눅에게도 1월 22일 숭의여학교장 대리인가를 취소하는 조치를 취했다.

선교학교 교장을 파면한 이 사건은 곧장 선교사들을 파송한 본국의 선교부에도 영향을 미쳐 선교부에서도 학교의 존폐를 두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됐다. 이 문제에 대해 가장 선명한 입장을 보인 곳은 남장로회였다. 남장로회에서는 신사참배를 시키기보다는 학교를 폐쇄하는 쪽을 택했다.

그러나 캐나다 선교부는 신사참배는 애국적 행사라는 총독부의 주장을 수용하여 학교를 보존하는 쪽으로 입장을 결정했다. 다른 선교부에서는 원칙적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하되 학교를 지속시키고자 하는 미련을 완전히 버리지는 못했다.

이런 문제는 지금 돌아보아도 참 어려운 결정이라고 생각된다. 신앙적 교리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그동안 선교를 위해 이루어 놓은 모든 기독교 학교를 포기할 것인가, 아니면 이 학교들을 포기하더라도 신앙의 원칙을 지킬 것인가. 지금 우리가 다시 그런 상황이 되어도 똑같은 고민을 할 것 같다.

그러나 역사는 우리에게 분명한 가르침을 준다. 적당한 타협은 결국은 패망을 가져온다는 것을.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자 이렇게 타협적 입장을 취한 선교사들도 결국 일제에 의해 추방당하고 미션학교들과의 관계도 끊어지고 말았다. 조금만 양보하면 더 큰 것들도 다 양보하게 돼 있다. 그러면서 결국 원칙도 잃고 실리도 다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가 가르쳐 주는 교훈이다.

오창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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