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8월 관동군사령관 출신의 미나미 지로가 제7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역대 총독 가운데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한국인을 압제했기에 ‘조선의 히틀러’라고 불렸던 인물이었다.
그는 취임 일성으로 “모든 한국인을 천황의 신민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는 “일본과 조선의 조상이 같다”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다”라는 구호를 앞세워 37년 10월 ‘황국신민서사’ 강요, 38년 2월 육군지원병제도 도입, 3월 조선어 사용금지를 지시했다. 39년 7월 국민징용령 시행, 11월 일본식 창씨개명 강요 등 일련의 식민지 정책을 지속해서 펼쳐 나갔다.
그는 황국신민화 정책의 일환으로 신사참배도 강요했다. 36년 8월 일제는 매달 6일을 애국일로 지정하고 국기(일장기)게양, 국가봉창, 조서봉독, 궁성요배,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전 국민이 신사참배를 할 수 있도록 조선 신사제도를 개정하여 ‘1면 1신사 정책’을 수립했다.
일본 정부는 이런 정책에 가장 장애가 되는 기독교에 대한 회유에 착수했다. 먼저 YMCA나 YWCA와 같은 기독교 기관들을 통폐합하거나 국제기구와의 관계를 단절하도록 만들었다. 아울러 수양동우회 사건을 일으켜 안창호 계열의 지식인을 검거했다. 흥업구락부 사건을 일으켜 이승만 계열의 인사도 대대적으로 검거했다.
이렇게 기독교계의 외곽세력을 무력화시킨 후 신사참배에 마지막 장애물이었던 장로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미 천주교와 감리교, 안식교, 성공회, 구세군을 비롯한 대부분의 기독교 교단이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있었다. 장로교는 그때까지 신사참배를 수용하지 않고 있었다. 게다가 장로교는 당시 기독교 교세의 4분의 3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로교를 굴복시켜야 진정으로 기독교를 굴복시킬 수 있었다.
그들은 38년 9월 9일 예정된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먼저 각 노회를 공격했다. 38년 2월 3일부터 선천읍남예배당에서 열린 제53회 평북노회에서 ‘신사참배는 종교 행위가 아니라 국가의례’라는 결의를 했다.
전국에서 가장 큰 교세를 가졌던 평북노회가 굴복하자, 뒤이어 총회 산하 전국 23개 노회 중 17개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6개 노회를 제외한 모든 노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총회의 대세는 신사참배 쪽으로 급격히 기울어지게 되었다. 이런 긴박한 상황 속에서 운명의 시간은 점점 9월 9일 총회를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서 신사참배 결의를 막고자 하는 마지막 노력이 장로교 증경 총회장이자 봉천신학교 교수였던 김선두 목사에 이루어졌다. 그는 합법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김두영 윤필성 박형룡 등과 함께 38년 8월 24일 일본 도쿄로 건너갔다.
이들은 박영출 목사의 안내로 일본 중의원 의원인 마츠야마(교회 장로)와 군부의 원로 히비키 장군(교회 장로), 조선총독부 초대 학무국장 출신으로 당시 궁내대신차관 겸 조선협회 이사장이던 세키야 등을 방문해서 한국교회의 어려운 상황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특히 히비키 장군은 일본 육군의 원로이자 교회 장로로서, 일본 동서전도회 회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는 3·1운동 직후 자기 교회 담임목사와 함께 일본 수상에게 한국 기독교에 대한 선처와 조선 총독의 경질을 강력히 요구했던 인사였다. 이들 3인은 미나미 총독과의 면담 때 신사참배 강요 철폐를 건의하기로 약속했다.
이들은 9월 1일 서울에 와서 한국교회 지도자, 선교사를 만나 실상을 듣고 3일 뒤 미나미 총독을 만났다. 이 자리에서 미나미 총독은 9월 9일 평양에서 열릴 예정인 제27회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도록 경찰에 행정 명령을 내린 것이 지나친 것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명령의 철회는 거부했다.
히비키 장군 일행은 할 수 없이 한국 대표에게 차선책을 제시했다. 그것은 평양총회에서 신사참배를 부결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만약 부결되면 총대 전원은 검속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문제가 조선 통치에 큰 차질을 가져오는 중대 문제가 돼 일본 중앙정부가 개입할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이때 자신들이 바른 해결을 하도록 돕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검속된 총대들은 10일 이내에 전원 석방을 보장할 테니 평양에 가서 총대들을 설득하라는 복안이었다.
이에 김선두 목사는 평양으로 향했지만, 조선인 목사 모씨의 밀고로 개성에서 대기 중이던 경찰에 체포돼 개성경찰서에 구금됐다. 김두영이 홀로 평양에 도착했으나 이미 총회장이 일본 경찰에게 포위되는 바람에 만나지 못했다. 이로써 김선두 목사의 마지막 노력도 실패로 돌아갔다.
만일 이 계획이 공지되고 검속을 각오하고 모든 총대가 뜻을 같이해 부결시켰다면 어떻게 됐을까. 이 사건이 보여주는 교훈은 한국교회 지도자들의 분열이 결국 스스로 무너지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80여년 전 역사는 오늘 한국교회에 분명한 교훈을 준다.
오창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