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국적의 로제타 홀(1865~1951)은 의료선교사로 1898년 평양에 여성치료소인 ‘광혜여원’을 세웠다. 쉬지 않고 사역했던 홀 여사는 뒤이어 평양외국인학교를 세웠고, 1928년에는 고려대 의과대학의 전신인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를 설립했다. 이화여대 의과대학 전신인 동대문부인병원도 그의 손끝을 거쳤다. 1951년 사망한 그는 남편 WJ 홀 선교사가 묻힌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지공원에 안장됐다.
결실은 또 있다. 의술과 복음으로 몸과 영혼을 치유했던 그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했던 사역은 시각장애인을 위한 학교를 세운 일이었다. 1894년 평양에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 맹학교인 ‘평양여맹학교’가 그것이다.
아무도 돌보지 않던 시각장애인에게 교육 기회를 준 홀은 글을 읽을 수도, 자기 생각을 남길 수도 없던 이들을 위해 점자를 만들었다. 뉴욕맹인교육학원 원장 WB 웨이트가 개발한 ‘뉴욕 점자’를 한국어에 맞게 수정해 시각장애인들에게 안겼다.
점자의 날인 지난 4일 문화재청은 대구대 점자도서관이 보유한 ‘로제타 홀 한글점자 교재’를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 예고했다. 홀의 한글점자 교재는 30일간 예고 기간을 거쳐 문화재위원회의 심의 후 문화재로 최종 등록될 예정이다.
홀의 한글점자 교재는 1897년 창안한 한글점자를 사용해 배재학당의 한글 학습서인 ‘초학언문’의 내용 일부를 수록했다. 기름 먹인 두꺼운 한지에 바늘로 점자를 찍었다. 홀은 이 교재로 시각장애 소녀 오봉래를 가르쳤다. 시각장애인에게 점자는 빛과도 같았다. 어둠 속에 살던 이들과 세상을 연결하는 삼겹줄이 됐다. 홀의 점자는 1926년 ‘한글점자 훈맹정음’이 창안되기 전까지 사용됐다.
이처럼 선교사들은 복음만 전했던 게 아니었다. 점자뿐 아니라 체계적인 한글도 선물했다. HG 언더우드와 JS 게일 선교사에 의해서였다. 이들은 모두 당시 우리나라에는 없던 한글사전을 만들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1890년 ‘한영자전’과 ‘한영문법’ 사전을 펴냈다.
이중 한영자전은 한영·영한사전으로 구성됐다. 한영사전엔 4910개, 영한사전엔 6720개의 단어를 담았다. 또 다른 사전인 한영문법은 영문으로 된 한국어 기초 문법서다. 품사에 따라 국어 문법을 체계적으로 기술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에 입국한 지 5년 만에 이룬 업적이었다. 후배 선교사들은 그가 만든 한글사전을 가지고 한글을 배웠다. 세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한글에 생명을 불어넣어 더 많은 사람이 배울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된 셈이었다.
고종이 한글을 우리나라 공식 문자로 선포한 게 1894년의 일이었다. 초창기 혼란스러웠던 한글 표기와 띄어쓰기는 한글 대중화의 걸림돌이었다. 혼란을 바로잡는 데 선교사들의 헌신이 있었다.
게일 선교사도 마찬가지였다. ‘한영자전’(1897)과 증보판 성격을 띤 ‘한영대자전’(1931)을 펴냈다. 번역 전문가였던 그는 1895년 최초의 한글 번역서인 ‘천로역정’과 1925년 ‘게일번역성경’도 출간했다.
독립신문은 게일의 한영자전이 나온 직후인 1897년 4월 24일 자에 이런 기사를 실었다.
“조선 사람은 몇천 년을 살면서 자기 나라말도 규모 있게 배우지 못했는데 외국 교사(선교사)가 이 책을 만들었으니 어찌 고맙지 아니하리오. 조선 사람 누구든지 조선 말도 배우고 싶고 영어와 한문을 배우고 싶거든 이 책을 사서 첫째 조선 글자들을 어떻게 쓰는지 배우기를 바라노라.”
빛과 소금이 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당부. 수많은 선교사가 곳곳에 남긴 사역의 결실, 쌓이고 또 쌓인 복음의 편린 속에서 빛과 소금이 지닌 의미를 생각해 본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