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을 삶으로 보여주는 것에 대하여 [우성규 기자의 걷기 묵상]

부산역에서 나오자마자 바라본 부산 동구 초량동 일대. 신호등을 건너 유흥가를 헤치고 초량교회로 올라가면 바다를 조망하며 걷는 길이 시작된다.






주말엔 걷기 묵상, 이번엔 부산이다. KTX로 부산역에 내리자마자 시작할 수 있다. 부산에서 축구 경기를 하면 공이 통통 튀어 바다에 빠질 것 같고, 고깃집보다 횟집이 많을 줄 아는 서울 촌놈에게 부산은 걷기 천국이다. 내 집 옥상 옆으로 남들의 보행로가 맞닿은 이곳에선 계단을 조금만 오르면 시원한 바다가 눈앞에 펼쳐진다. 피난민을 품느라 과거엔 판잣집 난개발이었는데, 이젠 집도 정비되고 오히려 자동차의 무분별한 접근을 막으며 아기자기한 골목을 유지하고 있다. 산복도로 위로는 또 자연을 그대로 보전해 부산 시민들은 저마다 머리에 공원을 이고 산다. 너무 부럽다.

부산역 앞 신호등을 건너 10분만 올라가면 초량교회가 나온다. 초량교회는 1892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윌리엄 M 베어드(1862~1931)가 사랑방에서 예배를 드린 모임을 모태로 한다. 이후 평양에서 숭실대를 설립한 베어드는 부산을 기점으로 대구-서울-평양-의주를 관통하는 복음의 행로를 꿈꿨다. 초량교회는 3·1운동 당시 영남 지역의 거점교회로 활약해 한때 이름을 초량3·1교회로 바꾸기도 했다. 신사참배 반대의 주기철 한상동 목사 등이 시무했고, 6·25 직후엔 전국 교회 목사 장로 통회자복 기도회가 열려 피난지에서도 교역자 부흥회를 이어갔다.

초량교회를 지나며 찬송가 387장 ‘멀리 멀리 갔더니’를 듣는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도 외로워/ 정처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 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베어드 선교사의 아내 애니 베어드 여사가 어린 딸을 잃은 슬픔과 선교여행을 떠난 남편의 안위를 걱정하며 윌리엄 피셔의 곡에 우리말을 붙인 노래다.

초량교회에서 간간이 바다 조망을 즐기며 계단을 오르면 ‘장기려 기념 더나눔센터’를 만난다. “행려병자의 아버지, 의료보험의 효시인 청십자조합 창설자, 무소유와 무욕의 삶, 시대의 성자, 국내 최초 간 대량 절제술 성공, 참 의사이자 참스승, 한국의 슈바이처…이 모든 수식어로도 부족한 성산 장기려 박사(1911~95).” 크리스천이 아니라 부산 동구청이 서술한 장 박사에 대한 소개다. 센터엔 종교적 상징물이 거의 없음에도 사람들은 이곳에서 장 박사의 삶 그 자체를 통해 복음을 접한다. 한 여성은 “기차 기다리는 동안 시간 때우려고 올라왔던 길에서 많은 것을 느꼈다”면서 “선생님께서 많은 사람을 값없이 돌보고 사랑하셨던 것처럼 살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적었다. 고교 교사들은 “믿음을 말없이 삶으로 보여주신 것, 우리도 그리 살겠습니다”란 메모를 남겼다.

센터를 나와 산복도로를 따라 부산항을 내려다보며 걸으면 중앙공원에 도착한다. 공원 건물에 ‘호국과 민주 정신이 살아있는 역사 테마 공원’이라고 적혀 있다. 전몰 군경을 위한 충혼탑과 박종철 열사 등 민주화 희생자를 위한 기념관이 동시에 자리하고 있는 중앙공원이다. 그렇다. 우리에겐 충혼과 열사, 호국과 민주, 둘 다 필요하다. 외부로부터 공동체를 지키고 그 공동체 안의 민주적 정당성을 외치는 노력은 서로 별개가 아니고 또 상극이 아니다. 이를 의도적으로 구분해 둘 중 하나만 필요 이상 강조하는 쪽의 정치적 저의를 의심해 봐야 한다. 대선이 다가올수록 더 그렇다.

중앙공원에서 40계단 쪽으로 내려와 ‘주책공사’를 찾아간다. ‘제2의 교보문고 되자’는 리본이 앙증맞게 붙어있는 주책공사는 독립서점이자 동네서점이다. 메이저 출판에서 만나기 힘든 개성 만점 책들이 매대에 그득한데, 책마다 작가의 친필 편지가 붙어있다. 주책공사의 영어 이름은 ‘Lord Book’ 주인장은 전직 목회자이며 무엇보다 주일에 쉰다. 선한 영향력을 좇는다는 점에서 책과 교회는 동역이다.

부산=글·사진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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