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진보 성향 월간지 세카이(世界)에 실렸던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은 군부 독재 시절 암울했던 한국의 현실을 전 세계로 알렸던 통로였습니다. 필자는 ‘T.K.생’이었죠. 중앙정보부가 정체를 밝히기 위해 혈안이 됐지만 결국 실패했습니다. 2003년 지명관 전 한림대 석좌교수가 자신이 T.K.생이었다고 밝히기 전까지 말이죠.
지 교수가 1일 98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그는 북한과 한국, 일본, 다시 한국으로 활동 무대를 옮기며 격동의 시대를 살았습니다. 교회 네트워크가 그의 활동을 물심양면으로 지원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지 교수에게 가명으로 세카이 기고를 제안한 건 서울대 기독학생회 후배였던 오재식 전 월드비전 회장이었습니다. 가명이다 보니 원고료조차 받을 수 없던 지 교수를 위해 그는 스위스 제네바의 세계교회협의회(WCC) 직원이던 박상증 목사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 소식은 곧 WCC 세계선교위원회 에밀리오 카스트로 총무에게 전달됐죠. 카스트로 총무는 고민 끝에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한일 교회 역사 연구’를 위해 지 교수를 일본그리스도교협의회에 파송한 것으로 가장한 뒤 10년이 넘도록 지 교수의 생활비를 보냈습니다.
1973년부터 1987년까지 연재된 ‘한국으로부터의 통신’은 이런 노력의 산물입니다. 생전 언론인 송건호 선생은 안재웅 한국YMCA전국연맹 유지재단 이사장을 만날 때마다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세카이의 글을 읽어보면 기독교회관에 앉아서 생생한 뉴스를 듣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인터넷도 없고 국제전화도 쉽지 않던 시절 한국의 실태는 인편으로 도쿄의 지 교수에게 전해졌습니다. 이를 위해 일본 도쿄에 본부를 둔 독일개신교선교연대(EMS) 동아시아 본부 책임자였던 파울 슈나이스 목사가 나섰습니다. 그는 부인과 딸을 비롯해 가용 가능한 모든 인력을 수시로 한국으로 보내 정보를 수집했고 이를 지 교수에게 전했습니다. 한 편의 글이 나오기 위해 ‘첩보 작전’이 필요했던 셈입니다.
이삼열 대화문화아카데미 이사장은 2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해외에서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많은 분이 헌신했지만, 그중에서도 지 교수의 희생은 가장 컸다”며 “긴 세월 가명으로 살며 대단한 작품을 남겼고 이 글이 각국 언어로 번역돼 한국의 현실을 세계로 알렸다”고 전했습니다. 지금의 자유는 공짜로 얻은 게 아닙니다. 지 교수의 별세 소식이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던 많은 이들을 생각나게 합니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