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창일 기자의 미션 라떼] 100여년 전 선교사들처럼 ‘이웃 사랑’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지공원에 있는 한 묘비 모습. 6·25전쟁 때 총알을 맞아 묘비 모서리가 부서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활동했던 의료 선교사 올리버 에비슨(1860~1956)이 1900년 4월 미국 뉴욕 카네기홀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1893년 내한한 그는 조선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을 책임지고 있었다. 1885년 개원한 제중원은 환자가 늘면서 큰 규모의 새 병원이 필요했었다. 에비슨이 이날 무대에 선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 제중원의 시설로는 밀려드는 환자를 다 볼 수 없어 새 병원이 급히 필요한데 예산이 부족하다”며 “조선 정부가 의료선교를 제재하지 않고 있는 만큼 병원에 대한 투자를 통해 복음도 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조선인을 위한 병원 건축을 위해 서울에서 1만1000㎞ 떨어진 뉴욕까지 배와 기차를 타고 달려간 에비슨의 호소는 땅에 떨어져 사라지지 않았다. 루이스 세브란스(1838~1913)가 그의 메시지에 응답했다. 록펠러와 함께 석유회사 ‘스탠더드 오일’을 설립한 세브란스는 당대 ‘석유왕’ 중 한 명이었다.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의 한 교회 장로이기도 했던 세브란스는 “주는 기쁨이 받는 것보다 훨씬 크다”는 말과 함께 1만 달러를 전달했고, 곧이어 5000달러를 추가로 건넸다. 에비슨은 가뭄 끝 단비와도 같던 기금으로 부지부터 마련했다. 현재 서울 중구 통일로 세브란스빌딩이 선 바로 그 자리였다. 1902년 건축을 시작해 1904년 지상 2층 지하 1층의 서양식 병원이 섰다. ‘세브란스병원’의 출발은 이랬다. 훗날 세브란스 장로는 의대 건립을 위해서도 3만 달러를 더 헌금했다.

제임스 스카스 게일(1863~1937) 선교사는 한글에 생명을 불어넣은 인물이었다. 캐나다 출신인 게일은 1888년 YMCA 파송을 받아 한국에 온 뒤 40년간 활동했다. 어학 천재였던 그는 한국어를 빠르게 익힌 것뿐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의 한영사전을 만들고 존 버니언의 소설 ‘천로역정’과 찬송가를 우리말로 번역했다. 성경 요한복음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고린도서도 한국어로 번역했으며 ‘갓(God)’을 ‘하나님’으로 확정한 것도 그였다.

한국 고전 문학을 해외에 소개하는 데도 앞장섰다. ‘구운몽’을 비롯해 ‘춘향전’과 ‘홍길동전’이 그의 손끝을 거쳐 영문으로 재탄생했다. 1898년 서울 종로구 연지동에 있는 연못골교회(현 연동교회) 초대 목사로 사역하면서 연동여학교와 예수중학교도 설립해 교육에서 소외돼 있던 이들에게 배우는 즐거움을 선사했다.

비단 이 둘만의 사역이 지금까지 기억되는 건 아니다. 무수히 많은 선교사가 우리나라를 깨우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서울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에 묻힌 많은 선교사는 앞선 두 선교사처럼 복음뿐 아니라 교육과 의료 사역을 하며 신앙인이라면 마땅히 감당해야 할 사명을 묵묵히 수행했다.

성경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권하면서 이를 최고의 법으로 꼽는다. ‘교회의 공공성’을 이야기하는 학자와 목회자들에게 금언과도 같은 말이다. 코로나19 3년 차를 맞은 한국교회가 공공성 회복에 큰 관심을 두고 있다. 앞다퉈 교회의 공공성을 주제로 한 콘퍼런스와 세미나도 열고 있다.

한국교회가 이제 와서 교회의 공적 역할에 강조점을 둔 건 분명 아니다. 이미 100여 년 전 선교사들을 통해 교회가, 교인이 감당해야 할 사회적 책임을 엿봤기 때문이다. 지탄받는 교회가 아니라 사랑받는 교회가 되는 길은 교회의 공공성 추구에 있다. 네 몸처럼 이웃을 사랑하려는 노력이, 실추된 교회의 위상을 다시 끌어올리는 동력이 되지 않을까.

글·사진=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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