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해 보이던 학교가 순식간에 지옥으로 변한다. 종전까지 함께 일상을 나누던 친구가 좀비가 돼 주위 사람을 공격한다. 아이들은 극악한 죽음의 공포를 체감한다. 지난달 28일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지금 우리 학교는’(지우학)은 좀비의 위협에서 생존하기 위한 학생들의 처절한 사투를 담았다. 지우학은 공개 첫날 넷플릭스 TV쇼 부문 글로벌 1위에 올랐다. K드라마로선 ‘오징어 게임’ ‘지옥’에 이어 세 번째다.
외신들의 호평도 쏟아진다. 미국 연예매체 버라이어티는 “‘오징어 게임’과 마찬가지로 악몽 같은 공간적 배경을 최대한 활용해 다른 세상에 있는 듯한 아찔한 효과를 준다”고 평가했다. 영국 일간지 가디언도 “한국의 좀비 쇼가 당신을 놀라게 할 것”이라며 “지우학은 세계를 뒤흔드는 어두운 실존주의를 그린 작품”이라고 보도했다.
드라마의 원작은 웹툰이다. 주동근 작가가 2009년부터 2011년까지 네이버 웹툰에 연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좀비물이면서도 다양한 서브플롯을 담고 있다. 학교 폭력에 대한 고발, 친구를 위해 희생하는 아이들의 순수함 등을 보여준다. 어른이 아닌 고등학생을 주인공으로 함으로써 다른 좀비물과 차별되는 면면도 볼 수 있다. 극한의 공포상황에서 학생들은 책상, 걸상, 소화전 등 학교의 자원을 활용해 살기 위한 방법을 끊임없이 생각해낸다.
주 작가는 지난 2일 국민일보와 서면 인터뷰에서 “재난을 통해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며 “어른들 없이도 재난을 극복해 나가는 아이들의 성장과정을 담았다”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은 사회적 약자지만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며 “아이들이 겪는 시련을 마치 옆에서 지켜보듯 같이 응원하고 이겨 나갔으면 좋겠다. 재난을 맞이했을 때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도 다시 한번 생각해 봤으면 한다”고 강조했다.
웹툰의 판권 계약을 한 뒤 드라마로 만들어지기까지 5년 가까이 걸렸다. 웹툰을 그릴 때부터 영상화를 염두에 뒀다는 주 작가는 “예고편을 보는 순간 ‘기다린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웹툰 작가로서 인지도가 13년 만에 생기기 시작한 기분이 든다”고 소감을 전했다.
10여년 전에 그린 작품이 드라마로 제작되는 것에 대한 부담도 있었다. 웹툰 연재 이후 많은 K좀비물이 흥행했기 때문이다. 주 작가는 “웹툰 연재 당시만 해도 좀비라는 단어를 잘 쓰지 않던 때라 이야기 속에서 최대한 언급을 자제했다. 하지만 예고편에서 등장인물이 ‘부산행이다’라는 대사를 말하는 장면을 보고 걱정을 많이 씻었다”고 답했다.
실제로 이 대사 덕분에 작품에 신선함이 가미됐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부분의 좀비물은 주인공이 좀비를 잘 모른다. 하지만 지우학에선 등장인물들이 좀비에 대해 잘 아는 상태에서 대처법을 찾기 시작한다. 작품 연재 후 꽤 시간이 지났지만 주 작가는 좀비 바이러스라는 소재가 지금의 현실에 더 적합하다고도 봤다. 그는 “코로나19 팬데믹 시대를 사는 지금 더욱더 현실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고 했다.
지우학은 주 작가의 데뷔작이다. 그는 첫 작품의 소재로 좀비를 선택한 이유를 “가장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학교를 배경으로 택한 것도 비슷한 이유다. 주 작가는 “내가 아는 사적인 이야기와 내가 생각한 판타지를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이 학교였다”며 “장소가 중요했다기보다 대한민국에 좀비 바이러스가 퍼진다고 가정했을 때 이질감 없이 현실적으로 다가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우선이었다”고 전했다. 이어 “어른이 겪는 재난보다는 아이들이 겪는 재난이 좀더 마음을 움직였다”고 말했다.
현실감을 중요시하는 주 작가의 작품은 사실적인 그림체가 특징이다. 스마트폰 화면, 커피 믹스 포장까지 고증하듯이 그려낸다. 상황 설정 역시 독자가 이질감을 느끼지 않도록 세밀하게 신경 쓴다. 지우학의 등장인물이 박스와 박스 테이프로 좀비에게 물리지 않도록 보호대를 만드는 모습, 학교에서 찾을 수 있는 밀대를 학생들의 주 무기로 설정한 것, 학교 양궁부가 화살로 좀비를 쏘아 죽이는 것 등도 현실감을 고려하면서 만든 장치다.
좀비가 출현한 상황에서 매끄럽지 못했던 정부의 대처도 ‘있을 법한’ 설정이었다. 주 작가는 “정부가 컨테이너로 도시 전체를 막는다거나 늑장 대처하는 설정은 당시의 한국상황을 잘 반영한다고 생각했다”며 “현실을 비판하기 위해 넣은 것이라기보다 그게 가장 현실적이라고 봤다”고 설명했다.
지우학에서 좀비 바이러스는 학교 폭력의 비극 때문에 탄생한다. 어떤 학생들에게 학교는 좀비 출현 이전부터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학교 폭력 피해자인 아들을 도우려다 좀비 바이러스를 만들게 된 효산고 과학교사 이병찬에 대해 주 작가는 “현실적이면서 인간적인 인물”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가족을 많이 사랑하는 인물이지만 남의 자식이 귀한 줄은 모르는 사람”이라며 “이 엄청난 일은 그가 자신의 아들만 생각해서 내린 잘못된 결정에서 벌어진 비극”이라고 전했다.
현재 주 작가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웹툰 지우학이 글로벌 연재 서비스를 시작했고, 웹툰 ‘아도나이’도 연재 중이다. 그동안 주 작가는 좀비 외에도 강시, 괴담 등 호러물을 주로 그렸다. 그가 대학생이었을 때 본 영화 ‘새벽의 저주’ ‘28일 후’와 같은 작품의 영향이 컸다. ‘구니스’ ‘ET’ ‘기묘한 이야기’같이 호러물이면서도 아동 감성을 다소 가미한 작품에도 관심이 많았다. ‘강시대소동’(2012~2014년)을 연재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귀도’(2016년) 이후 가정을 꾸리면서 잠시 휴식기를 가진 주 작가는 2019년 사이비종교를 다룬 ‘아도나이’로 돌아왔다. 올해 목표도 ‘아도나이’를 잘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외계인을 신으로 믿는 사이비 종교 ‘앙천회’에 한 기자가 잠입해 취재하는 줄거리다.
‘아도나이’를 기획한 계기는 평범했다. 주 작가는 “가끔 거리를 걷다가 이름이 생소하거나 외형적으로 이상한 건물들을 보면 ‘도대체 저긴 뭐 하는 곳이지’ 하는 의문이 든다”며 “그런 건물을 마주하고 상상력을 키워나간 작품”이라고 말했다. 사이비종교라는 민감한 주제를 다루다 보니 초반에는 오해에 따른 항의도 여러 차례 받았다. 그는 “‘가상의 종교지만 특정 종교가 떠오른다’ ‘불쾌하다’ 등의 항의로 시작부터 주눅이 들었다”며 “더 조심스럽게 접근하게 됐다”고 전했다.
주 작가는 스토리텔러로서 입지를 다지고 싶다고 했다. 그는 “스티븐 킹 같은 진짜 이야기꾼이 되고 싶다”며 “나의 상상력을 웹툰이라는 콘텐츠에서 실현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웹툰 작가는 보통 데뷔한 지 10년 정도가 지나면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자세히 기억하기보다 ‘재밌다’ ‘재미없다’ 둘 중 하나로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며 “‘그 사람 웹툰 재미있던데’로 기억되는 작가가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
최예슬 기자 smar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