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랑스러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국민의 책임과 의무를 다할 것을 엄숙히 선서합니다.”
구순을 앞둔 벽안의 외국인이 박범계 법무장관 앞에서 국민선서 낭독을 마치자 갈채가 쏟아졌습니다. 미국인 웨슬리 웬트워스(한국명 원이삼·87) 선교사가 한국인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한국 땅을 밟은 지 57년 만입니다.
24일 정부과천청사 법무부 대강당에서 마련된 ‘특별공로자 국적증서 수여식’은 대한민국을 위해 봉사하고 헌신한 외국인 유공자들에게 한국 국적을 부여하는 자리였습니다. 웬트워스는 자비량 문서선교사로 활동하면서 기독교 세계관과 기독교 학문을 전파했습니다(국민일보 2월 3일자 29면 참조). 이를 통해 한국의 교육 발전과 인재 양성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겁니다. 2012년 특별공로자 국적 수여 제도가 생긴 이래 10번째 특별 귀화자입니다.
파란색과 회색으로 어우러진 한복을 차려입은 웬트워스는 소감을 발표하면서 “한국은 나의 집입니다. 한국을 사랑해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얼마 전 인터뷰에서는 특별 귀화를 두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날 행사장에는 웬트워스의 오랜 친구들이 하객으로 참석했습니다. 홍병룡 아바서원 대표와 신국원 총신대 명예교수, 김종현 ES그룹 회장 등은 행사 내내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가장 눈길을 끈 이는 월드비전 회장을 지낸 박종삼(86) 한국글로벌사회봉사연구소장이었습니다.
의사 출신인 그와 웬트워스의 만남은 1965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가 광주기독병원 치과 레지던트 시절, 당시 병원 건축 업무를 맡고 있던 웬트워스와 처음 만났습니다. 둘 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더 각별한 우정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행사 전후로 웬트워스의 드라마 같은 ‘특별 귀화 작전’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웬트워스와 40년 지기인 김종현 회장은 해가 지날수록 웬트워스의 비자 연장 업무가 어려워지는 상황에 애가 탔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해 말 ‘아프가니스탄 특별 기여자들, 한국 정착’이라는 뉴스를 접하면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한국에 처음 온 아프가니스탄인들도 여기에 눌러살 수 있는데, 평생 여기서 헌신한 웬트워스는 왜 안 될까.’
이후 김 회장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와 법무부에 편지를 보내고 문의하면서 방법을 찾아 나갔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웬트워스의 특별 귀화를 위한 탄원서를 지인들에게 돌렸는데, 단 열흘 만에 1000명 넘게 동참했습니다. 김 회장은 “웬트워스가 한국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에피소드”라고 귀띔했습니다.
웬트워스에겐 집도 차도 재산도 없습니다. 몇 주 전 만난 그는 십수 년째 입고 있는 체크 남방 위에 실로 꿰맨 노란색 패딩 점퍼를 입고 있었습니다. 평생 청빈한 삶을 이어온 그를 향해 ‘천국을 향해가는 나그네’라는 수식어는 어색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같은 한국인이라는 게 자랑스럽습니다.
과천=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