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로 내리는 커피] 팬데믹이 탄생시킨 최초의 커피



나폴레옹 퇴위 직후인 1814년 5월 14일 프랑스 중부의 작은 마을 르망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훗날 조선에서 커피를 처음으로 마신 주인공 시메옹 베르뇌다. 사제 서품을 받은 2년 후인 1839년 파리외방전교회에 입회, 이듬해 선교지 베트남을 향해 떠났다. 8개월 만에 마카오의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에 도착했고, 이곳에 잠시 체류하는 동안 조선 유학생 두 명을 만나 철학을 가르쳤다. 조선 최초의 유학생 김대건과 최양업이었다. 베르뇌 신부는 1841년 1월 베트남에 도착한 직후 체포돼 참수형 선고를 받았다. 참수 직전 극적으로 석방된 후 만주에서 10년간 선교사로 활동하던 베르뇌 주교가 조선에 입국한 것은 1856년 3월이었다.

입국해 한양의 전동(현 견지동)에 머물며 선교 활동을 이끌었다. 철종 즉위 후 천주교 박해가 뜸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1859년 12월 갑자기 박해가 시작됐다. 경신박해였다. 천주교 신자를 색출하는 과정에서 약탈과 방화가 이어졌다. 이 무렵 설상가상으로 콜레라 팬데믹이 조선 땅을 덮쳤다. 세계인을 공포에 떨게 했던 제3차 콜레라 팬데믹 여파였다. 일본에서도 도쿄 지역에서만 10만명 이상의 희생자를 냈다.

경신박해가 시작됐을 때 베르뇌 주교는 지방에 머물고 있었다. 박해 소식을 듣고 한양으로 향했지만 거주지가 있던 도성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체포령이 떨어진 상태에서 서양인 신부가 사대문을 통과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결국 도성 진입을 포기한 채 머문 곳이 남대문 밖 자암마을이었다. 지금의 순화동 부근이다. 이곳에 숨어 지내던 베르뇌 주교의 심정은 당시에 쓴 그의 서신에 잘 나타나 있다. “들킬 위험이 큰 상황에서 늘 빠져나갈 방도를 염두에 두고 대비”하며 지내야 했다. 베르뇌 주교가 파리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 리부와 신부에게 보낸 서신을 통해 커피 원두를 주문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위기 상황 속에서였다.

1860년 3월 6일 선교 활동에 필요한 물품을 주문하면서 베르뇌 주교는 커피 40리브르(18.14㎏)를 주문했다. 커피를 통해 콜레라와 박해가 주는 이중의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베르뇌 주교가 요청한 커피는 새로 입국하는 랑드르, 조안노, 리델, 칼레 신부 등 인편을 통해 주문한 지 1년1개월1일 만인 이듬해 4월 7일 새벽 5시 자암 거처에 도착했다. 이들과 조선인 신자들이 마신 것이 조선 최초의 커피였다. 리부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베르뇌 주교는 달콤한 커피 덕분에 불안한 시간을 잘 넘길 수 있었다고 적었다. 이후에도 베르뇌 주교는 1866년 순교할 때까지 거의 매년 40~100리브르의 원두를 주문하곤 했다. 5000~1만잔 정도의 커피를 끓일 수 있는 양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 첫해에 세계에서 유일하게 커피 수입이 증가한 나라가 대한민국이었다. 박해와 팬데믹하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조선 최초의 커피를 주문했던 160여년 전 베르뇌 주교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 커피가 주는 마음의 평화로 고통의 시간을 넘어서고자 하는 간절한 염원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다.

이길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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