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듣고싶은 설교] 복을 깨닫고 누리는 길







‘천국의 대헌장’, ‘기독교의 대헌장’, ‘황금률’, ‘성경 중의 성경’, ‘천국의 복음’, 찬사가 담긴 이 모든 표현들은 마태복음 5~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서도 백미로 꼽힌다는 의미입니다. 이 주옥같은 말씀이 ‘무리’에게 하신 말씀인지 아니면 ‘제자’에게 하신 말씀인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같은 내용을 담고 있는 누가복음 6장 20절에 ‘무리’라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말씀은 무리가 아니라 ‘제자’를 향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제자와 무리는 어떤 큰 차이가 있는가의 문제와 직면하게 됩니다.

제자와 무리는 다릅니다. 무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적용하지 않습니다. 반면, 제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개인적으로 받아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2절을 보면 예수님은 ‘입을 열어 가르쳐 이르시되’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립해 나아갑니다. 주일을 성수하고 찬양하며 기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린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듣지 못한다면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저 무리 중에 한 사람일 뿐입니다. 또 신앙생활을 오랫동안 해 왔고, 교회에서 많은 직분을 통해 열심히 활동을 했다 하더라도 성경 말씀을 묵상한 대로 순종하며 살지 않는다면 그 사람 또한 제자일 수 없습니다.

상황이나 사물을 바라보는 가치와 시야에 대해서도 제자와 무리는 서로 다릅니다. 특별히 산상수훈에 나와 있는 팔복의 예를 통해 그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세상은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를 복 받지 못한 실패한 자라고 규정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자들을 오히려 ‘복되다’고 말씀하시고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제자는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순종하지만, 무리는 그 의미조차 이해하지 못하기에 순종하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제자의 삶에는 무리가 살아내지 못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의중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그 차이가 큽니다.

산상수훈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무리는 이러한 복을 깨닫지 못하기에 누리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자는 이 복을 깨닫고 삶 속에서 그 복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세상이 볼 때, 제자의 삶은 무리의 삶보다 피곤해 보일 수 있습니다. 대가를 치러야 하고, 하고 싶은 것을 내려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살아가는 제자를 향해 복된 삶이라고 정의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태복음 5:3

첫 번째 복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되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에 기술된 팔복에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나오지만, 누가복음 6장 20절에서는 심령이라는 표현 없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합니다. ‘가난’이라는 것을 심령에 국한시키지 말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가난’이 복이 될 수 있을까요? 놀랍게도 가난이 복이 될 수 있습니다. 물질의 궁핍함으로 힘들게 살다가 예수님을 붙잡게 되었다면 그 사람에게 ‘가난’은 그야말로 복입니다. 하나님은 가난이 선이고, 부가 악이라는 이분법으로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가난한 자 중에도 심령이 강퍅할 수 있고, 풍요함이 하나님 앞에 나가는 것의 걸림돌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복된 삶은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 복된 길에 걸림돌이 된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직 심령이 가난해질 때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마태복음 8장에 1백 명의 부하를 거느리는 로마의 백부장이 나옵니다. 높은 직책을 가졌고 부와 명예를 모두 가진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주님 제 하인의 병을 고쳐주옵소서’라며 예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자신이 가진 부와 명예와 상관없이 심령이 가난하기에 믿음으로 주님에게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 하인의 병을 고쳐 주실 능력과 권세가 있음을 확신하고 인정한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의 실질적인 사례입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등장하는 부자 청년은 백부장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자신이 무슨 선한 일을 행해야 영생을 얻겠는지, 모든 계명을 다 지켜 행했는데 무엇이 부족한지, 그는 예수님에게 묻고 있습니다. ‘선한 것을 더 지킬 필요가 없다’고 스스로 말하는 격입니다. 그런 그에게 가난한 마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청년에게 재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들은 부자 청년은 재물이 많은 까닭에 근심하여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믿고 있는 재물이 있었기에 청년의 심령은 가난하지 않았습니다. 재물이 주님에게 나아갈 길을 막은 것입니다. 재물이 많은 것은 세상에서는 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재물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아오지 못한다면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재물을 쌓아 놓는 것이 복이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것이 복입니다.

그렇다면 ‘심령이 가난하다’라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두 가지를 나누겠습니다.

첫째, 심령이 가난한 것은 처한 환경에 상관없이 영적으로 겸손한 태도를 말합니다. ‘자랑할 것도 내세울 것도 없는 아무것도 아닌 자’라고 고백하는 자에게 천국이 임합니다. 구원이 그런 자들에게 임한다는 뜻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처럼 죄인 중에 괴수라고 고백하게 될 정도로,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구원자를 찾게 마련입니다.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말은 죽어서 가는 천국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사는 삶에 천국이 임했음을 뜻하기도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만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이 통치하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 즉 천국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내가 의지할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다고 고백하는 자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복을 누리며 제자로서 역전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에게 나아가야 하는 이유입니다.

둘째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영적 갈망이 있다는 뜻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심령이 깨지고 망가져서 초라하고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아 보입니다. 하지만 그 상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을 붙잡게 됩니다.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주님 앞으로 성큼 나아가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영적 갈망이 생긴 것입니다.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주님은 그것을 해결하시기 시작합니다.

누가복음 18장 9~14절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보면 누구의 마음이 가난한지를 볼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소리 내어 기도합니다.

“내가 저 세리와 같지 않음을 감사하나이다. 저는 토색도 안 했고 음란하지도 않았고 불의하지도 않았습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했고 십일조를 냈으며 저 세리보다 하나님 앞에 내세울 것이 많은 것을 감사하나이다”

그의 심령은 가난해 보이지 않습니다. 마음에 자랑할 것으로 가득 차 있을 뿐입니다. 반면에 세리의 기도는 어떻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저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저는 죄인이로소이다. 주님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세리는 심령이 가난하기에 영적인 갈망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 시편의 기자도 42편에서 이와 동일한 마음으로 자신의 가난한 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편 42:1-2

하나님은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 마음으로 주님을 갈망하며 예배하는지를 보십니다. 역대하 16장 9절에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갈급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찾으십시오. 하나님을 갈망하는 영혼에게 하나님은 능력을 베푸시고 만족함을 주시며 참된 복을 허락해 주십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팔복 중에서 첫 번째가 ‘심령이 가난한 자’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야말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첫 번째 자격 조건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영적 겸손과 영적 갈망이 있는, 가난한 심령으로 삶 가운데 참된 복을 누리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황덕영 새중앙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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