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미술가 열전’을 쓴 조르주 바사리는 “가장 위대한 재능의 비가 하늘에서 내려와 어떤 초자연적인 이유로 한 사람만을 흠뻑 적신다면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라고 했다. 일제강점기 조선에 대입하면 김종태(1906∼35)가 그런 사람이 아닐까.
천부적 재질을 가진 사람이 갖기 쉬운 안하무인과 무절제함, 기행과 독설은 화가의 삶에 드라마적인 요소를 더했다. 하지만 29세에 평양에서 개인전을 하던 중 장티푸스에 걸려 어이없는 죽음을 맞으면서 아까운 재능은 봄날 목련꽃처럼 툭 져버렸다. 결혼하지 않아 유족도 없었다. 그 바람에 생전 천재적인 붓질로 쓱쓱 그렸던 100점도 넘을 작품들은 지켜지지 못하고 흩어져 사라졌다. 그를 이어 ‘조선 제일의 양화가’로 불린 이인성(1912∼50)이 조금 더 긴 38세의 삶을 살았지만 유족이 있었기에 지금도 대중에게 기려지는 것과 대조적이다. 김종태의 작품은 겨우 4점이 전해져 위악적 삶을 살았던 요절 천재 화가의 존재를 증거할 뿐이다.
그중 한 점이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돼 국가에 기증됐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명작’전에 소개되고 있다. 제목은 ‘사내아이’(1929년)다. 초록 저고리에 남색 조끼를 입은 사내아이가 근심 하나 없는 표정으로 낮잠을 잔다. 제법 꿀잠에 빠진 듯 고개가 왼쪽으로 기울었다. 쌔근쌔근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상반신을 가슴께부터 잡아 아이 표정에 집중케 하는 대담한 구도, 색을 최소한으로 쓴 단순미, 넓은 붓을 써서 시원스레 붓질하는 방식, 배경을 극도로 제한해 인물을 돋보이게 수법 등에서 독창성이 보인다. 유화로 그렸지만 여러 번 덧칠하지 않고 한 번의 붓질로 대상의 특징을 포착해 내는 것은 동물적 감각이 없고서는 불가능하다. 수채화 같은 투명한 느낌을 주는 화법에 시대를 초월해 찬사가 쏟아진다. 이건희 회장과 홍라희씨 부부도 아주 아껴 유족 품에 있을 줄 알았던 이 그림이 기증된 걸 보고 항간에서는 ‘배달 실수 아니냐’는 우스개도 나왔다.
김종태는 조선미술전람회(선전)가 낳은 스타 화가다. 조선총독부가 주최해 1922년부터 매해 열린 선전은 일제강점기 화가로 출세할 수 있는 유일한 신인 등용문이었다. 특히 서양화 부문은 조선에 건너온 일본인 화가와 일본 유학 중인 재학생과 졸업생이 참가하기에 당선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김종태는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독학파다. 그런데도 20세인 26년에 ‘자화상’으로 첫 입선을 한 뒤 27∼33년 중 한 해를 제외하곤 6차례 연속 특선을 했다. 그의 미술 교육은 30년 일본으로 건너가 선전 심사위원을 역임한 일본인 화가의 지도를 잠깐 받은 게 전부다. 그때도 일본에서 문부성전람회에 반기를 든 야수파 계열의 이과(二科)전에 출품해 입선하면서 ‘조선 제일의 양화가’라는 호평을 듣는다.
총독부는 미술인의 선전 참여가 급증함에 따라 위계를 두기 위해 14회(35년)부터 추천 제도를 신설했다. 김종태는 한국인 최초로 서양화 부문 추천작가로 추대됐다. 이어 이인성 심형구 김인승 등이 추천작가가 된 선전의 스타였다. 다른 작가들이 유학파인 것과 달리 김종태는 아마추어로서 최고에 올랐다.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난 김종태는 김포민전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서울에 올라와 경성사범학교를 다녔다. 경성의 주교공립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잠시 있었다. 성장과정과 가족관계 등은 베일에 싸여 있다. 보통학교에서 함께 교사생활을 했던 미술비평가 윤희순에게 쓴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어려서 출가를 하였지요. 어머니의 주장으로. 그것이 일곱 살 때입니다. 나는 모든 과거를 매장한 지 오래입니다. 가정이 어디 있으며 가족이 어데 있습니까.”
그는 교사로 재직하며 선전에 작품을 발표했다. 27년 6회 선전에서 ‘어린이’라는 표제로 소년을 그린 유화가 일약 특선이 되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했다. 신문에 밝힌 소감에는 “교편을 잡고 있는 탓에 그림 연구 시간이 없어서 이번 작품도 겨우 20분 내외의 짧은 시간에 그렸다”고 했다.
유화는 덧칠하는 게 특징이다. 유화 물감을 쓰면서 단번에 그리는 붓질은 정규 미술 교육을 받은 화가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서구의 조형방식을 모방하기 급급했지만, 독학파인 김종태는 그런 분위기에서 이탈해 개성적인 표현을 했다. 서구의 어느 사조를 떠올리게 하는 유학파 그림과 달랐다. 어떤 제도 교육의 구속도 없이 ‘조선적인 색깔’ ‘조선적인 얼굴’을 표현했다.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된 ‘사내아이’에 등장하는 둥그스름한 조선인의 얼굴, 우리 여름 산을 떠올리게 하는 의복의 초록과 남색 색상 조합이 그렇다. 이 작품은 같은 해에 앳된 소녀를 모델로 그린 ‘노란 저고리’(국립현대미술관 기존 소장품)와 소재와 구도, 색상 등에서 짝을 이루는 것 같다. 이 그림 속 소녀는 소년과 달리 정면을 응시하지만 상반신을 클로즈업한 과감한 구도가 비슷하다. 저고리의 노란색과 옷고름의 붉은색 대비는 개나리꽃 핀 봄날 풍경처럼 정겹다.
쟁쟁한 유학파를 제치고 내리 특선을 하며 20대에 스타가 됐으니 행태는 거칠 것이 없었다. 안하무인의 태도와 기행, 낭비벽이 입길에 올랐다. 그래도 처세는 좋았다. 미술교사도 다른 과목을 가르쳐야 하는 규정이 있었지만, 교장의 배려로 하루아침에 미술만 담당하는 특혜를 받았다. 그런 교장도 35만원 교사 월급의 절반을 점심 외상값으로 쓰고 이를 메우려고 학생들에게 받아둔 월사금까지 써버리자 더는 두둔하지 못했다. 학교에서 쫓겨난 후에는 별다른 직업 없이 친구들 집을 전전했다. 그럼에도 양주를 물 마시듯 했고 호기롭게 인력거를 탔다. 한번 팔았던 그림을 주인에게서 빌려와 되파는 이중판매도 버젓이 했다.
부잣집 아들로 김종태 윤희순과 함께 삼총사처럼 지낸 화가 이승만은 “정상적일 수 없는 생활이었지만 그림 그릴 때만은 태도가 돌변해 다른 사람이 되곤 했다”고 회고록에 썼다.
작품을 비판할 때는 지독한 독설가였다. 선배 화가 이종우는 한국인으로는 처음 파리 유학을 가서 현지 공모전에 당선됐다. 그가 귀국해 개인전을 했을 때 모두가 금의환향에 대한 감탄사를 연발했다. 김종태는 “파리를 알 수 있을 만큼 파리의 기분을 잘 내어놓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조선인 작가로는 조선의 고유색을 가져야 할 것이다”라고 일침을 놓았다. 35년 선전 최고상을 받은 이인성의 ‘경주산곡’에 대해서도 “새 새끼와 같은 아이의 얼굴이 미개인의 모습이 여실히 드러났으니 그것을 조선의 로컬이라고 할까. 조선색을 낸다고 과거의 빨간 진흙산을 그려야 하는 것은 대단한 인식 부족으로 신조선은 녹색화하여 그러한 골동산(骨董山)은 볼 수가 없다”고 꼬집었다.
이런 일화는 김종태가 작품 속에서 일관되게 무엇을 추구했는지 짐작하게 한다. 당대 최고의 미술비평가 김용준으로부터 “누가 봐도 ‘저건 조선인의 그림이군’ 할 만큼 조선 사람의 향기가 나는 회화”라고 칭찬받았던 천재 화가 김종태. 그의 때 이른 죽음은 한국미술사의 큰 손실이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