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바꿔드릴까요?”
잠시 후 수화기 너머로 나지막하게 강원도 사투리가 들려왔습니다. 1년 6개월여 만의 통화였던 터라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가던, 그렇지만 기자의 뇌리에 깊이 남아 있던 목소리가 분명했습니다. “저한테는 ‘권씨’라는 호칭도 무거워요. 그저 지나칠 수 없어 저에게 허락된 ‘쬐깐한 거’ 흘려보내는 것뿐이지요.”
그렇게 이번에도 ‘권씨’가 그의 이름 석 자를 대신하게 됐습니다(국민일보 2020년 9월 8일자 31면 참조). 창간호부터 국민일보를 보면서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 대한 기사를 볼 때마다 성금을 보내온 권씨는 ‘가난한 부자’였습니다. 강원도 삼척의 작은 마을에서 물이 새거나 부뚜막이 무너진 이웃집을 찾아가 수선해주는 일을 업으로 살아오면서도 주머니에 채워지는 적은 돈을 힘겹게 살아가는 이웃을 위해 전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태안 기름유출 사고 주민 돕기’ ‘북한 결식어린이 돕기’ ‘화재로 무너지거나 수해 입은 교회’ 등 국민일보가 전한 수십 개의 기사 말미 성금자 명단엔 그의 이름이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2년 전엔 결혼 50주년을 기념해 아내와 함께 여행을 가려고 10년 동안 모아 온 500만원을 아프리카 주민들의 코로나19 의료지원을 위해 쾌척하기도 했습니다. 50번째 결혼기념일을 어떻게 보냈는지 묻는 기자에게 권씨는 “아내랑 같이 7000원짜리 선짓국 한 그릇씩 맛나게 먹었다”며 웃었습니다.
그런 권씨의 눈에 최근 우크라이나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전쟁의 화마 속에서 상처 입은 피란민을 돕는 선교사들, 교회에 밀려온 피란민들로 인해 생긴 성경 품귀 현상 등이었습니다. 마음이 동했습니다. 지난달 삼척시로부터 지급받은 재난지원금이 떠올랐습니다. 인터넷도 모르고 휴대전화도 없던 촌로(村老)는 손자의 힘을 빌렸습니다. 국민일보 지령 1만호를 맞아 삼척 자택을 찾았던 기자가 남겨둔 명함을 꺼내 연락을 취해 왔습니다.
“1차 재난지원금은 북한선교단체에 보냈고, 2차는 강원도 고성 산불 피해 주민들 위해 보냈어요. 3차 지원금이 나왔길래 어떻게 흘려보낼까 아내랑 기도하면서 고민하던 중에 기사를 본 거지요.”
70대 중반을 훌쩍 넘은 나이, 수차례 수술대에 오르며 갑상샘을 절제하느라 쇠약해진 몸으로 살아가는 권씨였지만 그에게 주어진 재난지원금은 그의 시선에서 더 큰 재난을 당한 이에게 흘러갔습니다.
58년 전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던 권씨에게 우크라이나·러시아 간 전쟁 소식은 가슴 미어지는 현장의 재현입니다. 그는 “전선을 경험한 사람들은 전쟁에 승패가 없음을 사무치게 가슴에 새기며 산다”며 “매일 새벽 우크라이나의 평화를 위해 기도한다”고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을 묵상하고 고난의 길에 동참하며, 섬김과 나눔으로 선행을 실천하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권씨가 삶으로 보여주는 섬김은 크리스천으로서 마음에 새겨야 할 선함과 긍휼을 오롯이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출 33:19)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