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듣고싶은 설교] 슬픔이 주는 복







산상수훈의 시작은 팔복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메시지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은 사람을 찾고 계시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천국에 관해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팔복이란 ‘어떤 사람에게 천국이 임하는가?’에 관한 말씀입니다. 즉, 누가 하나님의 다스림과 인도하심을 받는 제자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한 자에 이어 애통하는 자를 복이 있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애통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처럼 억누르지 못할 정도로 몹시 슬프고 가슴 아파하는 심정을 가리킵니다. 일종의 어둡고 슬픈 감정에 대해 예수님은 복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자아가 그저 행복하기를 원하고 기뻐하기를 원하며 즐겁게 살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자아의 감정이 중요할 뿐, 그 감정들이 어디에 닿아 있고 어떤 관계 안에서 다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않습니다. 예수님과 세상이 애통에 관해 접근하고 해석하는 바가 전혀 다른 이유는 이러한 차이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애통에는 세상에서 통용되는 것과 달리 영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서 당하는 고통 때문에, 억울한 일 때문에, 일이 잘 풀리지 않기 때문에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 그런 애통이 아닙니다. 세상의 눈으로는 결코 보지 못하는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며 아파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무엇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애통하는 것일까요? 첫째, 하나님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죄 때문에 애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어 구원을 받았지만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음을 인정하고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라는 호칭을 가졌지만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한 인생을 자각하며 울 수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이 있는 자라야 가능한 모습입니다.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면서 비로소 신앙의 성숙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둘째, 성도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겪게 되는 고난과 문제의 어려움 때문에 애통합니다. 하나님의 길을 가다가, 또는 하나님 앞에 섰을 때, 한없이 연약하고 부족한 모습을 돌아보면서 울던 욥처럼 통곡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51편 17절에서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상한 심령은 애통하는 심령이자 하나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심령을 뜻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의 모든 인생을 아시고 모든 속사람을 아시는 유일하신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서, 또 예배의 자리에서 진솔한 심정을 드러내며 울 수 없다면 그것은 가식이요 위선이며 완악한 심령입니다. 자신의 죄와 허물과 모든 연약함으로 인하여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할 때 하나님은 위로를 건네십니다.

‘위로가 뭐라고… 위로가 상황을 바꿔주나?’

‘조금 위로하고 격려해 주고 공감해 주는 것이 무슨 대단한 능력이라고’

‘위로가 아니라 고난과 문제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는 게 우선아닌가’

이런 생각들이 올라올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위로가 복’이라고 단정하십니다. 위로는 사람이 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헤아리시고 건네시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살다 보면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위로가 안 되는 아픔과 슬픔 속을 걸어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상황과 형편을 하나님 앞에서 애통해하며 기도할 때, 찬송할 때, 또 예배할 때, 하나님의 위로가 임하게 됩니다. 강한 사람이든 약한 사람이든 모두 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위로가 필요합니다. 여기에서 ‘위로’로 번역된 ‘파라칼레오’라는 단어에는 ‘곁에서 돕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말씀은 ‘예수님이 곁에서 도와주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 사용된 위로라는 단어가 시편 23편 4절에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안위하다’라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나함’이고, 다시 헬라어로 번역하면 ‘파라칼레오’입니다.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갈 때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습니다. 애통함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을, 주님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자기를 위로하고 곁에서 지키고 계심을 느낀 것입니다. 이어지는 5절에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다윗의 고백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단순한 동정의 수준이 아닙니다. 그 삶을 높여 주시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기름을 바르셨다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성령의 기름부음, 곧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모든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보호해 주신다는 뜻입니다. 마지막 절에서 다윗은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눈물을 흘리며 통곡하고 애통하는 자에게 부족함이 없는 위로의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세상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애통에는 차이가 또 하나 있습니다. 애통의 범위가 단지 개인의 죄와 인생 문제에만 한정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영혼들의 삶을 보면서도 애통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살아가신 삶의 행적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41절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바라보시며 우십니다. 장차 예루살렘 성이 훼파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 받을 것을 미리 보셨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1장 35절에서도 이러한 예수님의 애통한 심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죽은 나사로를 찾아가신 예수님은 무덤 곁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을 생각하시면서 비통의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면서도 많이 우셨습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은 “예수님께서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악한 세상과 죄에 빠져 있는 세대, 그리고 그 땅을 위해서 슬퍼하시고 가슴 아파 우신 것입니다.

주님이 애통하시는 것들에 대해서 우리도 같이 애통해해야 합니다. 자신의 문제뿐만 아니라 다른 영혼들의 삶을 위해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세대와 이 땅을 놓고 울어야 합니다. 성도의 삶은 애통의 삶입니다. 사도 바울은 동족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애통해하며 울었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에게 죄를 범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며 하나님 앞에서 울며 애통해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119편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을 보고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른다고 고백한 바 있습니다.

“그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성벽이 무너지고 성문이 불탔다는 소식을 듣고 수일 동안 슬퍼하고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다른 영혼들 때문에 눈물을 흘리며 통곡해 본 적이 있는지요? 정말로 힘든 상황과 어려움에 처해 있는 영혼들을 위해서, 신앙 때문에 핍박당하는 이들을 위해서, 북한의 지하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아직 구원받지 못한 세상의 수많은 영혼들을 위해서, 그리고 이 땅에서 소외받는 이들을 위해서, 울 수 있어야 합니다. 애통해해야 합니다. 애통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애통해하시는 것처럼 제자들인 우리도 같이 애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주님이 눈물을 흘리시며 탄식하시는 것처럼 우리 역시 눈물을 흘리며 함께 탄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찾고 계신 사람은 주님 앞에서 애통하는 자입니다. 주님은 그를 위로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가 임할 때, 애통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다스리는 천국이 임하는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입니다. 애통한 인생들을 위로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황덕영 목사
새중앙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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