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피카소(1881∼1973)가 1951년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이 지난해 70년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 왔다.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피카소, 탄생 140주년 특별전’에서였다. 격세지감이라는 반응이 많았다. 당시 70세의 피카소는 프랑스 남부 작은 마을 발로리스에 살면서 멀리 한국에서 일어난 전쟁의 참상을 고발하려고 이 작품을 제작했다. 북한의 황해도 신천에서 미군에 의해 자행된 대학살이 모티프로 알려졌지만 논란은 있다. 어쨌건 피카소는 44년 입당한 공산당원이었던 터라 미군을 겨냥한 선전·선동화라는 의혹이 미국을 중심으로 제기됐고, 반공국가인 한국에서도 피카소는 ‘빨갱이’로 낙인찍히며 70년대까지는 그 이름조차 입에 올릴 수 없었다. 아이들이 쓰는 크레파스 상표의 ‘피카소’ 이름도 폐기될 정도였으니까.
그 작품 ‘한국에서의 학살’의 산실인 발로리스에서 피카소는 또 다른 소중한 작업을 했다. 도자기 예술이다. 우리는 피카소를 입체주의 창시자로만 알고 있다. 그가 도자기 작업을 했다는 사실은 일반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피카소도 자신이 회화도 조각도 아닌, 기술로 치부되던 도자기에 손을 뻗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이 도자기 작업을 통해 피카소는 일부 상류층이 향유하는 엘리트 예술로서 미술이 아닌 대중적 예술에 눈을 뜨게 됐다. 도자기 작업을 처음 시작하던 48년에는 흥분해서 이런 말까지 남겼다.
“내가 만든 도자기를 시장에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브르타뉴 지방의 마을이나 다른 어디에서나 여인들이 우물에 물을 길으러 갈 때 내가 만든 물병을 들고 갈 수 있으면 좋겠다.”
시작은 우연이었다. 46년 여름 피카소는 프랑스 남부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인근 도예마을 발로리스에 들렀다. 작고 정겨운 마을이었다. 그곳에서 도예공방을 운영하던 조르주 라미예 부부를 만났는데 그들의 초대로 공방을 방문한 것이 계기가 돼 도예에 발을 들여놓았다. 숨 쉬는 흙이 인간의 손을 거쳐 도자기로 구워져 나오는 과정에 감동을 느낀 그는 1년 뒤 도예 작품으로 만들고 싶은 크로키 몇 장을 들고 공방을 다시 찾았다. 2년 뒤인 48년에는 발로리스의 저택을 매입했다. 67세에 내린 결단이었다. 이듬해에는 작업실을 차린 채 눌러앉았다. 55년 칸으로 이사할 때까지 발로리스를 창작의 근거지로 삼고 도예 작업에 몰두했다. 92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가 남긴 도자기 작품은 3000점 이상이다.
피카소는 ‘아비뇽의 처녀들’(1907)이라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통해 미술사에 혁명을 가져왔다. 스페인 태생으로 파리로 건너온 야심만만한 26세의 청년 화가가 해낸 일이었다. 몽마르트 언덕에 자리한 허름한 아파트 작업실에서 그린 이 그림에는 5명의 여인이 누드로 등장한다. 정면과 측면 등 다양한 각도에서 본 여체의 모습을 한 인물에 구사하는 파격적인 방식이다. 눈으로 본 대로 그리면 있을 수 없는 인물 묘사다. 입체주의의 원형이라는 이 작품에 대해 피카소는 “나는 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한 것을 그린다”고 선언했다.
이 작품으로 피카소는 미술사에 가장 파격적인 입체주의를 열었지만 그리 길지는 않았다. 1907년 막을 연 입체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과 함께 동력을 상실하고 전쟁이 끝나는 18년까지 약 10년간 지속됐을 뿐이다. 이탈리아 여행을 계기로 신고전주의 화풍으로 급선회한 적도 있다. 17년 장 콕토로부터 러시아 발레단을 위한 무대장식 공동작업을 권유받고 함께 로마에 갔을 때였다. 초현실주의 선언을 했던 시인 앙드레 브루통과 만난 뒤인 1920년대 후반에서 30년대 초반의 작업은 초현실주의 성향을 띠었다. 이렇듯 입체주의로만 알고 있는 20세기의 거장 피카소의 작품 세계는 다양하다. 조각 작업도 했다. ‘아비뇽의 처녀들’에 나오는 오른쪽 두 여성이 아프리카 가면 같은 얼굴인 데서 볼 수 있듯이 입체주의의 기원은 아프리카 원시 조각에서 비롯됐다. 피카소는 일찍부터 조각에 눈을 떠 다양한 작업을 했는데, 청동보다 다루기 용이한 나무 조각을 많이 했다.
피카소의 예술세계 변천을 잠시 돌아봤으니 60대 후반에 시작한 도자기 작업 이야기로 돌아가자. 나이가 들어서도 변함없이 열정이 뿜어져 나왔던 이 20세기의 거장은 접시를 캔버스 삼아 그리거나 고려청자에서 보이듯 음각이나 양각을 하고 도공들이 망친 도자기를 변형시켰다. 그 분방한 상상력 탓에 피카소의 도자기 작품을 보고 있으면 행복해진다.
처음에는 식기에 붓으로 아이가 그린 것처럼 단순하게 물고기나 사람의 얼굴 등을 그려 넣었다. 도공이 망친 화병이나 항아리 등 실패작들을 인물이나 동물 형태로 변형하기도 했다.
도자기 작업은 화가로서 유명해진 이후 시작한 것이니 피카소의 회화 세계 전반이 도자기 표현에 나타난다. 항아리 중간에 외눈이 커다랗게 박힌 초현실주의 경향의 작품이 있는가 하면 입체주의에서 봤던 아프리카 가면 같은 도자기 작품도 있다. 모국 스페인의 명물 투우 장면을 그려 넣은 접시도 있다.
올빼미는 특히 즐겨 다룬 소재다. 손잡이가 하나인 저그(액체를 담아서 부을 수 있게 주둥이와 손잡이가 있는 항아리)나 손잡이가 두 개인 화병에 올빼미를 많이 그려 넣었는데, 저그나 화병의 주둥이나 손잡이 등의 기능적인 모양을 회화적 요소로 바꾸는 데 천재적인 감각을 뽐냈다. 두 개의 손잡이가 달린 화병에 두 개의 올빼미 머리를 그려 넣기도 하고 부리와 눈썹을 그려 넣어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등 상상력이 빛난다.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돼 국가에 기증된 피카소의 도자기 작품에도 이 올빼미 도예가 포함돼 있다. 이 작품은 화병의 목과 주둥이 부분이 올빼미의 얼굴로 표현되고 손잡이는 날개가 됐다. 날개가 마치 팔처럼 돼 있다. 의인화한 올빼미의 손이 화병 몸통에 있는 여인의 얼굴을 잡고 있어 올빼미가 평생 여러 여인과 사랑을 했던 사랑꾼 피카소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피카소의 독창적 도자기 작품이 점차 주목을 끌면서 젊은 도공들은 그의 지도를 받고 싶어 했다. 사양길이었던 발로리스의 도자기 산업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이건희 컬렉션에 피카소의 작품이 회화가 아닌 도자기로 100점 넘게 수집됐다는 점이 흥미롭다. 구입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이호재 가나아트센터 회장은 “이 회장이 아주 재미있어했다. 회화에 비해 가격이 비싸지 않으니 즐거움 삼아 경매 등에서 구매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도자기는 회화도, 조각도 아니다. 하지만 피카소에게 도자기 작업은 회화이면서 동시에 조각이었다. 그 경계를 넘는 피카소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미래 먹거리를 늘 고민해아 하는 재벌 컬렉터에게도 필요해 도자기 작품을 좋아했던 건 아닐까.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