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이치를 분별하기 어려운 어린 생명들에게 전쟁의 참혹함은 더 클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 국경 도시 우즈호로드에서 피란민을 대상으로 사역하고 있는 정사라(61·키예프연합교회) 선교사는 지난 19일(현지시간)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피란민들과 함께 실시간으로 전투가 벌어지는 지역 뉴스를 접하고 있는데 러시아군 폭격 이후 어린이 사망자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말을 잇지 못할 만큼 슬픔에 잠긴다”고 전했다.
그는 남편 정광섭(63) 선교사와 이곳 대피소에서 구호 사역을 이어가던 중 4주 전, 현지인 목회자가 찾아와 다급히 도움을 요청했다고 말했다. 러시아군 포격으로 극심한 피해를 본 중남부 드니프로에서 보육원 아이들이 인솔자들과 피란을 왔는데 먹을 것이 없어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차량으로 30분을 달려간 피란민 마을 숙소에는 생후 3개월부터 16세까지 어린이 69명과 인솔 교사 10명이 초췌한 모습으로 대피 중이었다. 정광섭 선교사는 “감자 세 개가 남았다”는 원장의 말에 즉시 구호팀과 차량을 동원해 밀가루 식용유 마카로니 등 끼니를 챙길 수 있는 식량을 조달했다.
이들이 수차례 보육원을 방문해 신발과 옷, 축구공과 헤어드라이어 등 필요한 물품을 전달하는 동안 구호팀에 대한 아이들의 경계심도 누그러져 갔다. 새 신발과 새 옷을 태어나 처음 받아본 아이들에게선 미소가 번졌다. 조금씩 마음을 열고 대화의 물꼬가 트이자 가슴 먹먹해지는 죽음과 이별에 대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야기를 나눠 보니 부모들이 마약이나 알코올 중독자여서 정부에서 부모로부터 데려와 키우거나 여러 이유로 조부모 품에 자라다 조부모가 사망해 오게 된 아이들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아이들인데 전쟁까지 겪게 된 것입니다.”
정 선교사 부부는 교회 청년들로 구성된 ‘바이블 스쿨’팀을 구성,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식량과 물자로 도움을 주던 것에서 성경 말씀으로 상처를 보듬고 복음을 전하는 길을 냈다. 정사라 선교사는 “지난달 헝가리에서 오신 선교사님이 교회 청년들에게 바이블 스쿨 교육을 해주고 교재도 주셨다. 하나님께서 아이들을 만나게 될 것을 알고 예비해 주셨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정광섭 선교사는 “정부 관리기관에 해당하는 보육원에서는 원래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돼 있지만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을 고려해 원장님이 ‘바이블 스쿨’을 허락해주셨다”며 “매일 크고 작은 기적이 펼쳐지고 있는 우크라이나 땅에 복음의 씨앗이 떨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