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복’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영적 여정입니다. 미국의 신학자 제임스 C 하웰은 저서 ‘다시 읽는 팔복’에서 팔복을 ‘하늘에 닿을 수 있는 사다리’로 표현했습니다. 그에 따르면 가난한 자가 애통하게 되고 애통하는 자가 온유하게 되며, 온유한 자가 의에 주리게 됩니다. 또한 의에 주린 자는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긍휼한 자는 마음이 청결하며, 청결한 마음을 가진 자는 화평한 자가 되고 화평한 자는 의를 위해 박해를 받습니다.
오늘은 팔복의 마지막 단계인 ‘의를 위해 받는 박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마 5:10~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의’란 추상적인 정의나 사회 정의가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의를 위한 핍박’은 ‘그리스도로 인한 핍박’입니다. 성서에 나오는 ‘핍박’은 헬라어 ‘데디오그메노이’로 언어적, 육체적 폭력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의 가치관에 따라 살려면 이 땅에서 직면해야 하는 고통과 핍박이 있습니다. 세속적인 가치관과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요 15:19)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이 십자가를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주는 축복에는 관심을 두지만 역사의 변혁을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려 하지는 않습니다.
로마 시대에 그리스도인들이 겪는 압제는 가혹했습니다. 역설적이게도 박해가 교회의 급속한 성장을 가져왔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순교했습니다. 서머나교회의 감독 폴리캅은 156년 화형을 당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저주하라’는 말에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왔지만, 그분은 절대 내게 해를 입히신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의 왕이신 그분을 욕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한 시간 동안 타다가 잠시 후면 꺼지는 불로 나를 위협하지만 다가올 심판의 불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어째서 이렇게 지체하고 있습니까. 당신이 원하는 대로 속히 시행하십시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교회가 오히려 그리스도인을 박해하기도 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명목상 그리스도인들이 순수하게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을 박해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박해했던 사람들은 이교도가 아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핍박을 허용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축복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란 것을 보이기 위해, 사단에게 욥의 시험을 허락하셨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조심해야 할 점은 종종 자신의 잘못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음에도 그것을 핍박으로 곡해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핍박이 그리스도의 ‘의’가 아닌 자기의 ‘의’ 때문은 아닌지 살펴봐야 합니다.
이제 교회가 세상을 변화시키기 원한다면 ‘팔복’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을 설득하려면 예수님을 닮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 마주할 고난이 쉬워질 것이라거나 조금 있으면 편안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위안을 건네지 않으십니다. 그래도 우리는 천국의 소망을 품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고난을 겪을 때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고통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주님이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고난 중에서도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을 때 우리는 희망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 삶 속에서 자기 뜻을 완벽하게 이루십니다.
1. 지금 어떤 어려움에 봉착하셨습니까. 만일 나의 잘못이 없는데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욥의 질문을 떠올리십시오. “하나님, 제가 무엇을 하길 원하십니까”라고 물으십시오. 한동안 그 질문에 머물러 있다가 떠오르는 내용을 쓰십시오.
2. 현재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십시오. “지금 나는 이것이 원망스럽다. 이것 때문에 상처를 입었고 슬프다”라는 현재 감정을 느끼는 대로 쓰십시오.
3. 믿음을 가진다는 것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참모습입니다. 기다리는 행위는 다른 어떤 영적 훈련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더 잘 들을 수 있게 해줍니다. 고난과 절망으로 깨어진 나를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쓰십시오.
4. ‘의’를 위해 고난을 받은 경험에 대해 쓰십시오.
이지현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