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현지시간) 찾아간 미국 워싱턴DC 연방대법원 주변은 시끌벅적했다. 주변에는 차량과 인파를 통제하기 위한 바리케이드가 설치됐다. 주요 길목마다 경찰도 배치됐다. 낙태권을 옹호하거나 반대하는 단체와 시민 수백명이 몰려와 시위를 벌였기 때문이다.
낙태 옹호론자들은 오전부터 대법원 입구 계단 주변을 에워쌌다. 대부분이 ‘낙태가 생명을 살린다’ ‘낙태는 여성의 자기결정권’ 등 문구를 적은 팻말을 들었고, 확성기를 들고 대법원을 비난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오후 들어서는 낙태 옹호 시민들이 더 운집했다. “소름 끼치는 결정” “여성의 권리를 짓밟는 법원” 등의 비판이 쏟아졌다.
“낙태는 폭력”이라고 외치며 대법원 견해를 환영하는 사람들도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양측이 서로를 향해 소리를 내지르며 다가가 한때 충돌 우려가 발생하기도 했다. 낙태권을 둘러싼 찬반 시위는 이날 미 전역으로 확대됐다. 미국 사회가 이 문제로 얼마나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다.
낙태권이 순식간에 미국 정치 한가운데로 등장했다. 미 연방대법원이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한 ‘로 대 웨이드’ 판결을 뒤집는 의견을 다수의견으로 채택한 초안을 공개한 이후 파장이 확산하고 있다. 낙태권 문제는 진보와 보수 간 대결구도를 형성하며 중간선거의 핵심 의제로 떠오르고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여성의 선택권은 근본적 권리”라며 11월 중간선거에서 이를 옹호하는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낙태 문제를 선거 핵심 쟁점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부부도 “낙태권을 성문화하려는 사람들에게 투표하라”는 성명을 내며 가세했다.
‘로 대 웨이드’ 판결은 1973년 연방대법원이 임신 약 24주 뒤에는 태아가 자궁 밖에서 생존할 수 있다고 보고 그전에는 낙태를 허용한 것이다. 미국에서 낙태권을 보장하는 핵심 개념으로 받아들여 왔다. 폴리티코는 전날 대법원이 이를 뒤집는 내용의 초안을 작성했다고 보도했다.
미국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낙태권 옹호 단체인 미 구트마허연구소는 대법원이 기존 판례를 무효화하면 미국 50개 주 가운데 26개 주가 낙태를 사실상 금지할 것이라고 집계했다. 대부분 낙태에 반대하는 공화당이 우위에 있는 곳들이다. 미주리주의 에릭 슈미트 법무장관은 “대법원 판단이 내려지면 태어나지 않은 아기를 보호할 의견을 즉시 발표할 준비가 돼 있다”고 환영했다.
민주당은 헌법적 권리가 무너지게 됐다며 유권자들의 행동을 호소했다. 민주당 소속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와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공동성명을 내고 “대법원은 여성만이 아니라 모든 미국인에게 가장 큰 권리 제약을 가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여기에는 낙태권 보호에 긍정적 여론이 높은 만큼 이를 중간선거의 핵심 쟁점으로 끌고 가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다.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심판 성격을 낙태권을 둘러싼 진보·보수 대결구도로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CNN이 지난 1월 벌인 여론조사에서 미국인 69%는 현재의 낙태권을 지지했다.
반면 공화당은 이번 사안을 초유의 대법원 의견서 초안 유출 사건으로 초점을 맞추고 방어에 나섰다. 미치 매코널 상원의원은 “(초안 유출은) 연방판사를 위협하려는 급진좌파 캠페인”이라며 “대법원의 독립성에 대한 공격”이라고 비판했다.
워싱턴=전웅빈 특파원 im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