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위치가 곧 엄마 위치이자 계급인 동네 ‘상위동’. 동네 이름에 걸맞게 자신의 아이를 더 높은 위치에 올리려는 욕망으로 가득 찬 초등 커뮤니티의 민낯과 동네 학부모들의 위험한 관계망을 그린 드라마 ‘그린마더스클럽’이 관심을 끌고 있다. 방영 전부터 ‘초등판 스카이캐슬’ ‘제2의 하이클래스’란 수식어가 붙으며 주목을 받은 이 작품은 자녀를 둔 부모라면 한 번쯤 겪어봤을 이야기들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끌었다.
우리 사회의 뜨거운 교육열을 오롯이 반영하듯 자녀 교육을 중심축으로 벌어지는 이야기엔 충격적이고 자극적인 소재들이 쉴 새 없이 등장한다. 그중 최근 방송된 회차에서 경악을 금치 못할 장면을 마주했다. 동네에서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아이가 영재로 두각을 드러내면서 동네 학부모들이 선망하는 ‘거성대 영재원’에 합격하게 되자 모자(母子)를 향한 대우가 180도 달라진다.
더 큰 문제는 그때부터다. 영재원에 탈락한 초등 커뮤니티 일인자의 딸은 극에 달한 질투심을 통제하지 못한 채 남자아이를 동네에서 떠나게 할 방법을 궁리한다. 그러곤 학원에서 남자아이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용서받지 못할 거짓말을 한다. 또래 여자아이를 협박해가며 피해자 한 명을 늘리는 치밀함도 보여준다. 모든 과정을 이끌어가는 극 중 인물이 초등학교 1학년생이란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대한민국에서 건드리지 말아야 할 두 가지 시한폭탄이 군대와 교육’이란 웃지 못할 이야기가 여전히 공감을 얻고 있는 시대다. 이 폭탄이 상상 이상의 파급력을 보여주는 이유는 모든 이가 동등하게 짊어져야 할 의무와 평등하게 주어져야 할 기회를 담보로 ‘나만 행복하면 돼’라는 무한 이기주의가 작동할 때 대중의 분노가 극에 달하기 때문이다.
코로나 팬데믹과 함께 초등학생이 된 아이가 1년 6개월여 만에 첫 통지표를 받아왔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본능적으로 첫눈에 들어온 건 역시 ‘평가 항목’이란 제목이었다. 나도 내 아이가 자기 이름 앞에 ‘공부 잘하는’이란 수식어를 달고 생활하길 바라는 흔한 대한민국 부모 중 하나였음에 자조하며 시선을 옮기는데 뭔가 이상했다. ‘라떼 시절’의 수우미양가로 구분되는 평가가 온데간데없었다. 그 자리엔 ‘잘함’이 대신했다.
그 순간, 다행이고 고맙고 반가운 복합적인 감정이 휘몰아쳤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넉넉하고(우) 아름답고(미) 좋고(양) 가능성이 있어도(가) 빼어나지(수) 않으면 마음이 쪼그라들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 경험을 내 아이가 하지 않아도 되어서다. 서열화된 사회에서 처절하게 내 앞에 있는 누군가를 부러워하며 그 자리가 행복의 절정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통지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시선이 꽂힌 곳에서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바로 ‘행동특성 및 종합의견’란이었다. 그중에서도 마지막 문장이 가슴을 건드렸다. ‘자신의 재능과 노력으로 친구들에게 유용한 정보를 주고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것을 자신의 기쁨으로 생각하는 따뜻하고 넓은 마음을 가진 학생임.’
영화 필름처럼 아이의 행동 하나하나가 뇌리를 스쳤다. 자기가 재밌게 봤던 영화 속 주인공들을 친구들에게 소개해주고 싶다며 노트에 그림을 그리고, 컴퓨터로 검색하면 몇 초 만에 알 수 있을 만한 곤충들도 고사리손으로 자기 생각까지 적어가며 친구들을 위한 곤충 사전을 만들어 가방에 챙겨 갔던 모습들이다.
성경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고 말한다. 부모로서 아이에게 마땅히 가르쳐야 할 ‘행함의 길’은 ‘나만’에 있지 않고 ‘나도’에 있다. ‘나만 행복한 것’은 다른 이의 행복을 내 발아래에 두었을 때 가능하다. 하지만 ‘나도 행복한 것’은 다르다. 나만의 것에 그치지 않고 모두의 행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행복해서 모두가 행복하도록 행하는 아이들과 어른이 모여 살 때 ‘상위동’이 ‘행복동’으로 변할 수 있지 않을까.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