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창일 기자의 미션 라떼] 식민지 여성들의 강인함을 생각한다

1924년 한국YWCA 하령회에 참석한 회원들이 YWCA 깃발을 들고 기념 촬영하는 모습. 국민일보DB




애플TV+가 제작한 드라마 ‘파친코’는 모진 세월을 살아낸 한국 여성들을 세밀하게 관찰해 호평을 받고 있다. 1910년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의 주인공 ‘선자’는 숨 막힐 듯한 난관을 번번이 극복해내며 많은 이들을 눈물짓게 만든다. 드라마를 다 보고 나면 여성, 특히 일본에 살았던 한국인 여성들의 강인함을 새삼 생각하게 한다.

역경을 이겨낸 여성의 이야기는 이 땅에도 있었다. 1922년은 일제에 의한 문화통치가 한반도를 덮고 있었다. 1919년 3·1운동을 겪으며 무단통치에 한계를 느낀 일제가 꺼낸 유화책이었지만 여전히 일제 하의 삶이었을 뿐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허울 좋은 문화통치는 오히려 이광수 같은 지식인들의 변절을 불렀다.

반쯤 눈 감은 지식인들이 도처에 있었지만 몇몇 여성 지식인은 다른 길을 걸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김필례(1891~1983) 선생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국비 유학생으로, 신사참배를 거부해 폐교됐던 광주 수피아여학교와 정신여학교를 다시 열며 여성 교육에 헌신한 김 선생은 독립운동 명문가 일원이기도 했다.

3·1운동 후 중국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단체인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한 김순애가 언니다. 김순애의 남편은 신한청년당 대표 김규식이다. 그는 파리강화회의에 참여해 일제의 만행을 고발했던 인물이다. 이들의 오빠는 세브란스의학교 1회 졸업생인 의사 김필순으로, 안창호와 의형제를 맺고 신민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이들 남매의 조카가 3·1운동의 도화선이 됐던 2·8독립선언의 선언문을 우리나라로 가지고 들어온 김마리아다.

역사의 여러 변곡점에 김필례 선생의 흔적이 남았지만 그중 돋보이는 건 한국YWCA(한국Y)를 창립한 사실이다. 1904년 일본 도쿄여자학원 중등부에 입학해 서양사를 공부한 그는 일본에서 YWCA 활동을 처음 접했다. 당시 일본YWCA(일본Y) 총무였던 가와이 미치코의 인격에 매료된 뒤 한국에도 이 단체를 창립하길 바랐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중 독립적인 한국Y를 창립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20년 내한한 미국YWCA 위원들도 “일본Y 산하에 한국Y를 만들라”고 조언했을 정도였다. 그는 단호하게 거부했다. 기회는 1922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세계기독교학생회총연맹(WSCF) 대회에서 찾아왔다. 당시 한 흑인 강사가 무대에 올라 기독학생들의 책임을 강조하는 강의를 했고 이를 들은 김 선생은 충격에 빠졌다고 한다. “흑인도 저렇게 큰 역할을 하는데 식민지 국민이라고 못할 일이 없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었다. 사회적 편견을 딛고 일어선 한 흑인을 통해 용기를 얻은 셈이었다.

마침 현장에 있던 미치코 총무를 만나 “한국만의 독립적인 YWCA를 창립할 테니 도와 달라”고 부탁했고 “독립된 대표권을 인정받도록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귀국한 뒤 김 선생은 동료들과 함께 1922년 6월 13일부터 12일 동안 제1회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 하령회’를 진행했다. 여성을 일깨우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 하령회에서는 축첩과 이혼, 공창 등 민감했던 문제를 주제로 깊이 있게 토론했다. 하령회 마지막 날 65명의 참가자들은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기성회’를 조직했고 그는 초대 총무가 됐다. YWCA가 창립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1941년 일본Y에 흡수 통합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5년 뒤 재건한 뒤 긴 세월 동안 여성 노동자 직업개발 프로그램 마련부터 여성 지도자 양성 등 여성의 사회 참여와 영향력을 확대하는 일에 앞장서 왔다.

일제강점기 아래에서 어렵게 태동한 한국Y가 올해 창립 100주년을 맞았다. 김필례 선생이 그렸던 청사진은 한 세기 동안 얼마나 성취됐을까. 100주년 화보집의 이름 ‘우리 횃불을 들다’처럼 새로운 세기, 한국Y가 계승할 횃불에 기대를 걸어본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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