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에는 일정한 격식이 있습니다. 우리는 수신자를 먼저 언급하지만 초대교회 당시에는 발신자가 먼저입니다. 바울이 쓴 편지들은 모두 이런 형식입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는 다릅니다. 격식을 파괴하면서 도전적입니다. 그 교회에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기 때문일까요.
그 이유를 파악하려면 먼저 핵심 키워드인 ‘율법’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율법이란 물론 하나님이 인간구원을 위해 주신 것입니다. 하지만 율법에는 한계가 있습니다.(레 6:3, 4, 18:26, 마 5:48) 무엇보다 온전히 지킬 자가 없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그 율법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래서 탈무드나 미쉬나까지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다른 복음’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6절부터 ‘다른 복음’을 향해 집중포화를 가합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할례’라는 ‘다른 복음’이 잠잠해졌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할례 구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또 ‘다른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그 ‘다른 복음’은 교황을 중심으로 한 교권주의자들의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들은 성경을 독점했습니다. 미사도 라틴어로 집례했습니다. 알아들을 수 없으니 사제들이 가르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공교롭게도 베드로 대성당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십자군 전쟁을 치르기 위해 교회는 많은 재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러자 이들이 고안해 낸 ‘다른 복음’이 연옥설이요, 면죄부였습니다. 하지만 그 ‘다른 복음’도 구텐베르크의 인쇄 활자와 르네상스로 인해 막을 내렸습니다.
다시 세월이 흘렀습니다. 오늘 우리 안에는 ‘다른 복음’이 없을까요. 본문에서 무려 네 번이나 ‘다른 복음’이 언급됩니다. 그러다가 10절에서 갑자기 분위기가 바뀝니다. ‘다른 복음’이란 단어는 없지만 문맥상 ‘다른 복음’이 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합니다.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사람들을 좋게 하려는 것,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려는 것입니다. 더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것’이 오늘의 ‘다른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신앙 생활하는 중요한 동기가 나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안중에 없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도 관심이 없습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뇌도 없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내가 보혈의 은총으로 다시 살아났으니 우리의 삶은 덤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갈 2:20) 그렇다면 이제 나 중심에서 벗어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게 크리스천입니다.
팀 켈러 목사는 책 ‘내가 만든 신’에서 현대인들이 신을 만들어 조정하고 있다고 통렬히 지적합니다. 모두가 마음속에 각각의 우상이 있는데 그 우상은 ‘저것만 있으면 내 삶이 의미가 있을 거야’ 하는 바로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찾고 추구하고 매달립니다. 이 우상은 자주 바뀝니다. 왜냐하면 하나의 우상으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오늘 우리는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를 기쁘게 하려고 합니다. 그 안에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결국 자기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어떠한가요. 하나님이 앉으셔야 할 자리에 내가 앉아있지는 않습니까? ‘내가 만든 신’은 바로 내가 아닙니까. 바로 이것이 오늘 우리를 미혹하는 ‘다른 복음’입니다. 자기중심, 자기사랑, 자기 유익, 자기 욕심 말입니다. 이 ‘다른 복음’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갈 2:20)
옥성석 목사(충정교회)
◇경기도 고양에 위치한 충정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총회 소속으로 영성회복 해외선교 이웃섬김에 최선을 다하는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