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마지막 화요일은 ‘논쟁의 날’이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성전에서 예수님과 유대 종교 지도자들 사이에 치열한 논쟁이 있었던 날입니다. 이날 논쟁의 특징 중 하나는 ‘예수’ 대 ‘모두’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예수님의 모든 반대자가 논쟁에 나섰다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종교적 정치적 관점을 가졌던 바리새파 헤롯당 사두개파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반대하는 데에는 희한하게도 서로 일치했습니다.
논쟁의 목적은 상대를 말로 이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반대자들은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 최고의 지식인들을 내세웠고, 평소 불편하거나 소원한 집단과도 동맹하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관심은 논쟁의 승패가 아니었습니다. 논쟁에서 승리한다고 해서 상대의 생각과 삶을 바꿀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패배한 자의 복수심만 불러일으킬 뿐입니다. 예수님도 권한 논쟁, 세금 논쟁, 부활 논쟁 등에서 반대자들을 모두 이기셨지만, 패배한 이들 중 마음과 삶을 돌이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동참한 이는 거의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없애버려야 한다는 생각만 더 굳혔을 뿐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논쟁을 피하지 않으셨을까요. 그것은 논쟁을 걸어오는 이들보다 논쟁을 지켜보는 이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마가에 따르면 성전에서 있었던 예수님과 반대자의 논쟁을 ‘많은 무리’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직접 들으면서 급격한 의식의 변화를 보입니다. 가장 큰 변화는 메시아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로마 제국’이나 ‘유대 왕국’의 정치적 메시아와는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의 종말론적 메시아를 보고 깨달은 것입니다.
화요일의 대논쟁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이들은 복음서에는 아무런 말도 기록돼 있지 않은 ‘많은 무리’입니다. 그들은 마치 ‘청중 심사단’처럼 예수님과 유대 지도자들의 논쟁을 경청하고 판단해 누구를 지지할지를 결정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전세력이 왜 낮이 아니라 한밤중에, 성전이 아니라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을 체포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낮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체포하면 예수님을 지지하는 무리가 소동을 일으킬까 두려웠던 것입니다.(막 14:1~2) 같은 이유로 예수님도 무리의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밤에는 예루살렘 성 바깥으로 피신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체포에 ‘내부자’인 가룟 유다의 배반이 필요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겁니다.
마가가 묘사하는 ‘많은 무리’의 모습은 오늘날 한국교회의 ‘많은 교인’ 모습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두개파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은 유대 전통의 중심 세력이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주변부에서 올라온 낯선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논쟁의 청중은 맹목적으로 전통의 권위를 따르는 대신 주의 깊게 경청하고 주체적으로 판단해 예수님을 지지했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어떻습니까. 제도적 권위에 생각 없이 순종하는 수동적 신앙인입니까, 아니면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주체적 신앙인입니까. 탈진실(post-truth)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을 기쁘게 들었던 무리처럼 거짓과 진실을 분별하는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돼야 하지 않을까요.
정경일 성공회대 신학연구원 연구교수
◇정경일 연구교수는 지난 9년간 새길기독사회문화원장으로 일했고, 현재 성공회대 신학연구원에서 연구교수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설교문은 정 교수가 저술한 묵상집 ‘Passion, 고난과 열정의 동행’(대한기독교서회)의 원고 가운데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