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휩쓸던 2020년 6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몬트로즈(Montrose) 연합감리교회가 문을 닫게 됐습니다. 창고를 정리하던 교회 관계자들은 비닐에 포장된 두루마리를 발견했습니다. 세로 약 160㎝에 가로 50㎝ 정도 되는 족자였습니다. 비단 위에 소나무와 학을 한 땀 한 땀 수놓은 송학도(松鶴圖)였습니다.
교회 관계자들은 족자를 인근 교회 목회자인 강호식(그레이트밴드교회) 목사에게 가져왔습니다. 동양풍의 작품인 것 같은데 글자나 뜻을 해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강 목사는 20년 전 서울 원천감리교회(박온순 목사)에서 파송된 선교사였습니다.
족자를 살펴본 강 목사가 몬트로즈교회 관계자들에게 전달한 내용은 이렇습니다. “100여년 전 몬트로즈교회에서 한국(당시 조선)에 여선교사님을 파송했고, 그 선교사가 (평안북도)영변 지방에서 사역할 때 지방 여선교회로부터 받은 선물 같다.”
족자에는 ‘축하 조선선교기념’ ‘영변지방 전도부인 일동 증정’ ‘민예도 귀하’ ‘주후 일천구백이십삼년 일월’이라는 한글이 당시 표기법에 따라 새겨져 있었습니다. 민예도 선교사의 미국 이름은 에델 밀러(Ethel Miller·1893~?·사진)이며, 미국 감리교 소속 선교사입니다. 1918년 한국에 파송받아 1938년까지 사역한 것으로 기독교대한감리회 기록에도 남아 있습니다.
몬트로즈교회 관계자들은 강 목사를 통해 족자를 한국에 돌려보내기로 했습니다. 한국의 성도들이 민 선교사의 발자취를 되새기고 기념하는 게 좋겠다고 뜻을 모았기 때문입니다. 족자는 발견된 지 2년 만인 지난 4월 24일 원천감리교회를 거쳐 충남 서천의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에 기증됐습니다.
족자를 보면서 상상해봅니다. 지금으로부터 104년 전, 스물다섯 살의 꿈 많은 여선교사는 태평양을 건너 이역만리 식민지 나라에 짐을 풀었습니다. 오직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복음을 전하려고요. 99년 전 1월 어느 추운 겨울, 그가 사역하던 북쪽 지방의 전도부인들은 민 선교사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정성 들여 수놓은 족자를 선물합니다. 송학도 속 학과 소나무처럼 파란 눈의 선교사가 오래오래 살면서 이 땅에서 주님의 선교 사역을 감당해 달라는 마음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20년 사역을 마친 민 선교사는 고향 교회에 선물을 기증합니다. 180년도 넘는 역사를 지닌 그의 교회가 문을 닫을 때, 민 선교사가 받은 족자는 다시 세상에 나와 태평양을 건너왔습니다. 족자의 존재와 사연을 교계에 알린 박온순 목사는 “한국을 사랑한 민 선교사님의 희생과 그의 수고를 기린 영변 전도부인들의 마음이 오롯이 전해지는 것 같다”면서 “우리 모두에게 선교의 사명을 되새기게 만든 발견”이라고 말했습니다.
박재찬 기자 jeep@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