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이비 소스는 영미권 국가에서 널리 쓰인다. 팬에 스테이크를 구운 뒤 루와 육수를 넣어 걸쭉하게 끓인다. 토마토를 베이스로 비슷하게 만들어 바질이나 클로브로 향을 더하면 브라운 소스가 된다. 갖은 양념을 적당히 버무리는 어머니의 손맛이 우리 밥상의 비결이라면 집집마다 독특한 맛을 내는 소스는 서양 식탁의 매력이다.
경양식집에서 ‘함박스텍’을 주문하며 밥과 빵 중에 하나를 선택했던 시대는 오래전에 지났다. 이제는 연어를 먹을 때 타르타르 소스를 찾고, 에그베네딕트에는 홀랜다이즈 소스를 얹는다. 크래프트푸즈사의 A.1. 소스로도 스테이크를 즐기기에 충분하다. 돈가스에는 19세기 영국 우스터시에서 처음 등장했다는 우스터 소스가 그럴 듯하다. 이국적 향취의 동남아 음식도 쉽게 만든다. 베트남의 느억맘, 태국의 남쁠라는 오픈마켓에서 몇 천원이면 살 수 있다. 그조차 없다면 스리라차 소스 하나로 충분하다. 멸치액젓으로 맛을 더하고 레몬즙과 스리라차 소스를 뿌리면 훌륭한 쌀국수 국물이 된다. 몸은 서울이지만 마음은 하노이다.
케첩과 마요네즈밖에 몰랐던 우리가 세계 각국의 독특한 소스를 즐기게 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문민정부를 열었던 김영삼 대통령은 1994년 11월 ‘차세대를 위한 세계화 구상’을 선언했다. 개인의 외화보유를 자유화하고, 해외여행 경비 한도를 대폭 늘렸다. 제주도였던 신혼여행지가 하와이, 괌, 몰디브로 바뀌었다. 전 세계가 글로벌리즘이라는 거대한 격랑 속으로 뛰어들 때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유로운 국제무역은 전에 없던 수요를 촉발하고, 새로운 생활양식을 창조했다.
이제 그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며칠 전 스리라차 소스를 만드는 미국 후이퐁 식품이 생산을 중단했다. 원재료인 고추를 공급하는 멕시코의 가뭄 때문이라고 발표했지만 코로나19 팬데믹과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국제 원자재 유통이 원활하지 못한 탓이 크다. 막연했던 글로벌리즘의 종언이 스리라차 소스 없는 팟타이에서 실감나기 시작했다.
고승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