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신 27:5)
20년 전 걸려온 한 전화가 아직도 기억에 또렷한 이유가 무엇일까.
“원 장로님, 대표기도 담당간사입니다. 기도문을 3분 분량으로 써 보내주십시오.” “무슨 말씀인가요? 기도는 하나님께 영적으로 소통하면서 드리는 양심 내면의 고백이잖아요.”
“죄송합니다만, 주일예배가 실황중계에 맞추어 진행되니 시간 할당을 해야 합니다. 기도문을 사흘 전까지 제출해 주십시오.” “기도는 주님이 주시는 내적 자유 가운데, 각자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영적 소산인데 어떻게 간사님에게 먼저 보이고 왜 영적 비밀을 사전 공개해야 합니까” “방송을 보는 회중의 편의를 위해 미리 타이프로 화면 준비해야 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거룩한 예배의식을 전파 매체가 주도하는 주인공이 된 듯한 현실 앞에 마음이 불편했다. 일부 교회 예배당 한복판엔 으레 카메라가 상주하고 예배순서는 미리 짜인 콘티와 시간 배정에 따라 진행된다. 방송 중 광고도 경건한 예배 시간에 이루어진다. 문서선교란 미명 하에 교회 유관 출판사의 최신 서적이 소개되며 중간광고가 슬쩍 끼어든다.
교회도 시대에 뒤처지지 않으려면 사회 발전에 발맞추고 첨단 문명을 교회의 운영에 신속하게 적절히 응용하여 예배의 분위기를 띄우는 게 당연한 추세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신명기 27장 5절 말씀을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교회가 발전 모델로 대형화되고 세속화되면서 교회의 본질에 충실하기보다는 일반 기업이나 사회단체처럼 경영의 효율성이나 첨단 대중문화 조류를 쉽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쇠 연장을 지나치게 돌단에 들이대면서 치장을 하여 세상 풍조를 따라가는 형국을 하나님은 어떻게 바라보고 계실까.
언젠가 예배당 바로 앞에 앉아 예배를 드리던 송명희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가누기 힘든 목을 지탱하며 어려운 발음으로 찬양을 드리고, 아멘을 연발하며 ‘그 모습 그대로’ 산제사를 드리던 경건함을 잊을 수가 없다. 쇠 연장을 대지 않은 돌단을 쌓으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쟁쟁한, 팬데믹이 다소 진정된 2022년 7월이다.
<약력> △고려대 명예교수 △몽골 계시록교회 선교사역 장로 △한국언론법학회 창립회장 역임 △한국사회과학협의회 회장 역임 △한국언론학회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