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비트코인이나 가상 자산 같은 개념조차 생소하던 시절 친구로부터 투자를 권유받았다. 그날 저녁 친구에게 전해 들은 비트코인에 관해 남편에게 설명했다. 돌아온 대답은 “목회자는 물질에 욕심이 있어서는 안 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필요를 구해야지 투자를 해선 안 된다”는 것이었다.
“숨겨둔 비상금이라도 있다면 지금 투자하라”며 거듭 설득하던 친구는 “내 주변에 비트코인에 투자하는 목사랑 사모도 많다”며 최후통첩을 날렸다. “이건 투자가 아니라 투기”라고 비판하며 ‘누군지 몰라도 목회자 망신 다 시키고 다니네’라고 정죄하며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았다.
하루는 사역을 마치고 돌아온 남편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줬다. 장로님이 “사례비가 적어서 힘들지 않느냐”고 묻길래 남편은 “목회자이기에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부족해도 잘 살아내고 있다”고 말했는데 돌아온 대답은 이랬다고 한다.
“아니 사례가 작다고 왜 그렇게 쪼들리게 생활하나요. 목사님들도 제발 투자를 하세요. 정말 이해가 안 돼요. 요즘 목사님들 참 답답해요.”
사례가 적어 미안하다는 말이 아닌 ‘알아서 투자해서 돈 불려서 생활하지 왜 그렇게 궁핍하게 사느냐’는 말처럼 들려 남편은 마음이 상했다고 했다. 그날 저녁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당당하게 살자”라고 다짐했다.
몇 개월이 흘렀을까. 갑자기 비트코인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얼마 뒤 투자를 권유했던 친구의 승용차는 고급 외제차로 바뀌었다. 어림짐작하기로 그 친구는 큰 수익을 낸 듯했다. 그때 불현듯 아쉬움과 부러움이 솟구쳤다. ‘나도 남편 몰래 적은 금액이라도 투자해 볼 걸….’ ‘그때 친구의 말처럼 투자한 목사님은 얼마나 수익이 났을까...’
지난달 29일 국민일보는 서울의 한 교회 부목사들이 암호화폐 ‘루나’에 투자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대출을 받아 투자했고 현재 투자금 대부분을 날렸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코인에 대해 조금도 알지 못하는 부목사들이 동료가 얼마 안 되는 수익을 내는 걸 본 뒤 대출을 받아 투자를 강행했다고 한다. 기사에서 지적한 대로 이들은 벼락부자를 꿈꾸다 벼락거지가 된 셈이다.
기사를 접하며 친구의 바뀐 외제차를 부러워하고 아쉬워했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투자와 투기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이들의 마음도 이와 같았으리라.
요즘 사모들의 대화에도 코인과 주식 이야기는 빠지지 않는다. 코인 투자에 실패한 교회 청년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야기, 개척교회 사모가 아이 학원비를 벌기 위해 투자했다가 실패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씁쓸함을 자아낸다.
기독교윤리연구소에 따르면 목회자들 사이에서도 ‘주식투자는 어떤 경우에도 하지 말아야 한다’ ‘주식투자는 투기가 아니라면 신중하게 할 수 있다’ ‘성경적 세계관에 기초한 사회 책임투자를 이해하고 적극적으로 투자함으로써 투자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상반된 입장이 존재한다. 과연 어떤 것이 성경적인 것일까. 나도 아직 그 해답을 찾지 못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1~12)
바울의 고백처럼 우리의 삶은 가난할 수도 부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풍요로움과 평안을 찾고 그것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코로나의 재유행,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장기화, 글로벌 물가 상승 등의 여파로 한숨짓게 되는 요즘, 우리의 마음을 유혹하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이때 우리 삶의 여정에 하나님이 주시는 만나를 먹으며 생활했던 기쁨과 평안함을 다시 기억하자.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소망과 인도하심의 기쁨이 회복되길 소망하며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와 교회에 하나님의 풍성함이 넘쳐나길 축복한다.
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