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때부터 앞을 볼 수 없었던 시각 장애인이 있었습니다. 이 시각장애인을 보고 있던 제자들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2절) 제자들은 이 시각 장애인이 누구의 죄 때문에 그렇게 태어났는지를 질문합니다. 즉 이 고난의 원인이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예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이 물음의 이면에는 이 사람은 곧 죄인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시각 장애인이나 부모에게 죄가 있다고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이 사람이 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은 죄의 결과가 아닌, 하나님께서 목적을 두시고 그렇게 보내신 결과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3절)
그렇다면 시각 장애인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예수님은 안식일 날 이 시각 장애인을 고쳐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새롭게 창조하신 것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빛을 잃어버리고 흑암 가운데 사는 이 시각 장애인을 고치심으로써 예수님께서 바로 인류를 새롭게 다시 창조하시는 창조주이심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 시각 장애인을 고치시되 말씀으로만 고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실로암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아직 앞이 보이지 않는 그에게 그것도 눈에 진흙을 바른 상태로 말이죠. 예루살렘으로부터 실로암 연못까지 가는 것은 시각 장애인에게는 매우 어려운 길이였습니다. 길이 험하다는 것 외에도 더러운 진흙을 눈에 바르고 골목길을 지나갈 때마다 부딪치는 사람들의 비웃음도 각오해야 했습니다. ‘실로암’으로 가는 길은 ‘실로 암담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각장애인은 즉시 순종하여 ‘실로 암담한 길’을 나섭니다. 실로 암담했던 길, 실로 암담했던 인생이었지만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길을 나섭니다. 그리고 순종함으로 나선 그 길의 끝에서 혼돈과 흑암의 눈은 벗겨지고 밝고 빛나는 생명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실로암’이라는 단어는 ‘보냄을 받았다’라는 뜻입니다. 그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자 실로 암담했던 인생에서 주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인생으로 바뀌었습니다. 주님의 약속대로 그의 눈은 열렸고 사람들에게 조롱받는 자에서 살아계신 주님을 증거하는 자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 자신의 실로암으로 가라.” 때로는 실로암으로 향하는 이 길이 다른 사람들과 달리 먼 길을 돌아가야 하는, 그리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흑암 속에서 가파르게 내려가야 하는 실로 암담한 길일 것입니다. 치료가 더디고 기도 응답이 더디고 내 인생의 시간과 삶의 에너지가 더 드는 그 길을 걸어갈지라도 분명한 건 그 길은 주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부부도, 부모도, 자녀도, 심지어 신체적인 연약함과 질병도,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보내주신 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자신의 실로암 길을 끌어안아야 합니다.
그 길에 순종하여 낮은 곳으로 향할 때 그곳에서 치료가 일어날 것입니다. 그곳에서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 실로 암담한 인생에서 주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제자로 당당하게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그 은혜가 이 글을 읽는 모든 이에게 함께 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박병주 목사(송학대교회)
◇1954년 소나무 숲이 우거진 언덕에 세워진 송학대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소속으로 ‘하나님의 이야기로 역사를 만들어 가는 교회’를 지향합니다. 박병주 목사는 2017년 7월부터 담임으로 섬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