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 싫습니다. 호주나 영국에서 태어나지 못해 훈장은커녕 고액 체납자란 오명만 쓰고 있습니다.”
거액을 기부하고도 세금 폭탄을 맞은 생활정보지 ‘수원교차로’ 창업주 고(故) 황필상씨가 남긴 말이다. 황씨는 2002년 180억원 상당의 회사 주식 90%와 현금 15억원을 아주대에 기부했다. 아주대는 2003년 구원장학재단을 설립해 학생 수백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하지만 2008년 황씨에게 돌아온 건 140억원이 넘는 증여세였다. 세금 폭탄의 근거는 상속세 및 증여세법(상속증여세법) 48조 조항이었다. 이 법령은 장학재단과 같은 공익법인이 출연자와 특수관계에 있는 기업의 의결권 있는 주식을 5% 이상 보유하면 초과분에 대해 증여세를 부과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부자들의 편법 상속을 막기 위해 만든 법이 기부를 통해 나눔을 실천하려 한 황씨에겐 세금 폭탄이라는 철퇴가 돼버린 셈이다.
재단은 소송을 제기했고 재판이 길어지면서 가산세가 붙어 황씨가 떠안아야 할 금액은 225억원까지 늘었다. 급기야 황씨는 20억원의 재산을 강제집행 당하기도 했다. 대법원은 2017년이 돼서야 황씨의 손을 들어줬다. 황씨의 사례는 기부 후진국 대한민국의 수준을 그대로 드러냈다고 할 수 있다.
5년 전 황씨의 소송대리인이었던 소순무 변호사는 “착한 일을 했는데 재산을 몰수당한 사건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어 “상속증여세법 ‘5%룰’이 깨지면 부자들이 편법 증여 수단으로 악용할 수 있다는 우려가 있지만 제도적 감시 장치가 있는 만큼 이런 문제는 충분히 거를 수 있다”고 강조했다.
기부 의지 결딴내는 한국의 법과 제도
기부는 자기 자신이 소유한 무언가를 공짜로 내놓는 것이기에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하지만 한국의 법과 제도는 기부를 가로막는 장벽이 될 때가 많다. 기부자의 기부 동기와 의지를 꺾는 일이 허다하다. 대표적인 예가 주식을 기부할 때 적용되는 법령이다. 현행 상속증여세법은 공익 법인이 기업의 주식을 일정 비율 이상 기부받으면 최대 50%까지 증여세를 물린다. 올해부터 적용된 상속증여세법 ‘공익법인 등의 주식보유 관련 의무이행 신고제’에 따르면 공익 법인이 기부받을 수 있는 주식 비율은 성실공익법인(운용 소득 1년 내 80% 이상 사용, 자기내부거래 금지 등 8가지 요건을 갖춘 공익법인) 확인을 못 받은 공익법인은 5%, 확인을 받은 법인은 10%, 확인을 받고 주식 의결권 미행사를 법인 정관에 규정한 자선·장학·사회복지 목적 법인의 경우는 20%다. 공익법인의 기업주식 보유 비율 50%까지는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 일본이나, 관련 규제가 아예 없는 영국 호주 독일 등보다 규정이 훨씬 엄격하다. 자산가들의 편법 상속을 막아 상속세 및 증여세의 공정한 과세, 납세 의무의 적정한 이행 확보, 재정 수입을 원활하게 조달하기 위해 만든 법이 오히려 기부 의지를 꺾는 역효과를 내는 셈이다.
부동산을 기부할 때도 문제가 발생한다. 가령 상당한 가치를 띠는 부동산을 기부하려는 A씨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A씨는 우선 부동산을 매도해서 기부금을 마련하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부동산을 파는 즉시 소득세법에 따라 엄청난 액수의 양도소득세를 떠안아야 한다.
A씨가 공익법인에 부동산을 팔지 않고 부동산을 통째로 기부해도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공익법인이 기부받은 부동산을 자유롭게 처분하거나, 수익 사업에 활용하려고 해도 제약이 많기 때문이다. 공익법인 설립 운영에 관한 법령에 따르면 공익법인에 기부된 부동산은 ‘기본재산’으로 편입된다. 기부자의 뜻에 따라 현금화해 목적 사업에 사용하려면 기본재산을 보통재산으로 변경하는 주무관청의 용도변경 허가를 받아야 한다. 법인 설립 시 출연받은 재산 위주인 기본재산의 처분을 신중하게 해 운영의 안정성을 도모하려는 취지다.
전문가들은 과도한 세금이 기부 문화를 위축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기부 활성화를 위한 입법과 세제 개편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허준수 숭실대 사회복지학부 교수는 “금전적 이득을 위한 거래 행위가 아닌 기부 행위에도 세금을 부과하는 건 잠재적 기부자들의 기부 의사를 완전히 꺾어버리는 행위”라며 “정부는 기부 행위를 제한하는 모든 법안을 면밀히 검토해 기부자 중심의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당부했다.
국회에서는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려는 방안들이 강구되고 있다. 2020년 국회입법조사처는 ‘공익 기부 과세에 대한 입법 과제’ 보고서를 낸 적이 있는데, 여기엔 세금 회피 목적이 없는 공익 기부에 상속세나 증여세를 물리는 것은 ‘위헌적 과세 처분’이라고 적혀 있다. 법률에 따라 적법하게 세금이 매겨졌어도 결과적으로는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예방책으로 행정처분 단계에서 세금을 면제하는 ‘형평면제처분제도’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문은희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독일은 공익 기부자가 미처 예측하지 못해 세금을 짊어지는 억울한 사례를 구제하기 위해 국세기본법에 형평면제처분 규정을 두고 있다”고 설명했다.
해외 사례도 참고할 만하다. 상속재산의 10% 이상을 기부할 시에는 상속세 10%를 낮춰주는 영국의 캠페인 ‘레거시 10(Legacy 10)’이 대표적이다. 영국 금융컨설팅회사 ‘핀스버리’의 창업자 롤런드 러드가 2011년 시작한 이 캠페인을 통해 영국인들에게 유산기부는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볼 만한 선택지가 됐다. 2017년 영국에서 유산기부를 통해 쌓인 기부금은 22억4000만 파운드(약 3조3000억원)에 달한다. 이는 전체 기부금의 33%에 해당한다. 영국 정부는 당시 이 캠페인으로 상속세 세수가 줄어들 것으로 예상했지만 입법을 주저하지 않았다. 기부금이 노숙자 이민자 빈곤계층 등의 지원에 쓰이면 장기적으로 정부의 복지 부담을 낮출 수 있다고 판단해서다.
그렇다면 이런 법안이 한국에도 생긴다면 우리 사회의 기부 문화는 얼마나 달라질 수 있을까. 한국자선단체협의회가 2019년 발표한 ‘유산기부에 대한 인식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응답자의 51.7%는 영국과 같은 제도가 마련되면 ‘기부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실제로 국내에서도 유사한 법안은 발의된 상태다. 지난해 9월 더불어민주당 김병욱(성남분당을) 의원이 내놓은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이다. 개정안엔 상속재산의 10%를 초과해 공익 목적으로 기부하는 경우 상속세 10%를 감면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김병욱 의원실 관계자는 “지난해 하반기에는 대통령 선거 등 굵직한 이슈들이 많아 통과되지 못했다”며 “후반기 국회에서 이 법안이 논의되고 통과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유언장 작성 문화, 기부 장려 해법 될까
사회사업가 김모씨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그는 은행에 예치금이 123억원이나 있었다. 김씨는 2003년 11월 5일 세상을 떠났는데, 은행 대여금고에서 자필로 쓴 유서가 발견됐다. 유서엔 ‘본인 유고 시 본인 명의의 전 재산을 연세대에 한국 사회사업 발전 기금으로 기부한다’는 뜻이 담겨 있었으나 날인은 빠져 있었다. 김씨의 형제와 조카 등 유족 7명은 2003년 12월 은행을 상대로 예금 반환청구소송을 냈고, 연세대는 유언장을 근거로 유산이 학교 재산이라며 맞불을 놓았다. 하지만 결과는 유족의 승리였다. 만약 김씨가 생전에 충분한 시간을 두고 정확하게 유언장을 작성했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꿈쩍 않는 기부 관련 법제를 향해 불평만 할 게 아니라 유언장을 작성하며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국민 모두가 더 많은 기부를 결심해 목소리를 내면 기부 관련 법제들이 변할 수 있지 않을까. 원혜영 웰다잉문화운동 대표는 “평소 온전한 정신과 충분한 시간을 확보한 후 유언장을 작성하며 삶에서 고마웠던 일, 평소 아쉬웠던 일에 기부와 유산기부도 결심할 수 있다”고 했다.
다행히 최근 한국 사회엔 유언장 작성 문화 확산과 더불어 유언자의 의사대로 유언이 집행될 수 있도록 돕는 유언장 공적보관제도가 도입돼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유언법제개선변호사모임 이양원 변호사는 “유산기부는 상속재산을 법정상속인으로부터 수증자에게로 옮기는 것인데 그 방법은 유언이 유일하고, 유산기부 활성화를 위해선 당연히 유언의 대중화가 선결 조건”이라며 “자필증서 유언은 분실 은닉, 위·변조의 위험과 법원 검인 절차로 까다로워 국가가 낮은 비용으로 유언장을 관리해주는 유언장 공적보관제도 도입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즉 한국 사회에 유산 기부 문화가 활성화되려면 법과 제도가 정비되고 유언장 문화가 확산돼야 한다는 것이다. 비영리단체 컨설팅 전문기관인 도움과나눔 최영우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기부자는 세 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스스로 찾아 기부하는 사람, 절박하진 않지만 기부를 요청했을 때 기부하는 사람, 안 하고 싶은데 강권 때문에 기부하는 사람. 비율을 따지자면 각각 30%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 기부하려는 사람과 요청했을 때 기부하는 사람이 좀 더 기부에 적극성을 띨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특별취재팀 조재현 우정민 PD
박지훈 최경식 신지호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