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라벤나의 산 비탈레 성당은 비잔틴 예술양식의 보고(寶庫)이다. 특히, 모자이크 성화는 대표적 걸작으로 인간과 초월적 존재와의 영적 소통을 신비한 빛의 예술품으로 승화시켰다. 그 중에 하나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 선 모세’이다. 이 작품은 엉켜있는 떨기나무 가지마다 신성한 불꽃이 활활 타오르고 왼쪽 위의 하얀 여호와의 손은 마치 비스듬히 등지고 서 있는 모세를 부르는 듯하다. 또한 그는 신의 손을 통해 자신을 부르시는 선명한 음성에 귀 기울이면서도 아직 의심스러운 얼굴표정이다. 그러나 “네 신을 벗으라”는 여호와의 말씀에 엉거주춤한 자세로 신발 끈을 풀고 있다.
역사적 무대는 가나안에 살았던 야곱이 그의 가족들을 이끌고 대기근을 피해 애굽의 고센 땅에 거주한 지 350여 년이 지난 후였다. 당시 이집트 제국은 신 왕국 제18왕조 3대 파라오인 투트모스 1세가 통치하고 있었다.(그의 딸, 핫셉수트 공주가 모세의 양모이다.) 투트모스 1세는 이민족에 대한 탄압정책을 폈다. 심지어 새로 태어나는 히브리 사내아이들을 나일 강에 던져 죽이라는 민족말살정책을 명령하였다. 그러한 때 레위지파 아므람과 요게벳 사이에서 모세가 출생했다. 부모는 그를 석 달 동안 숨겨 키웠으나 더 이상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상자를 가져다 방수처리를 한 후에 아기를 그 속에 뉘어 나일 강에 띄워 보냈다. 마침 목욕하러 나온 애굽 공주의 손에 건짐을 받은 모세는 화려한 왕궁에서 왕자로서의 특별한 교육을 받는다.
그러나 장성한 모세는 고된 노예생활을 하는 자신의 동족에게 늘 동정하는 마음을 가졌다. 어느 날 노역하는 히브리 사람에게 폭행하는 애굽인 감독을 보고 분을 이기지 못해 그를 살해하였다. 그 후 모세는 도망자 신세가 되어 미디안 광야에로 피신한다. 그는 제사장 이드로의 맏사위가 되어 양떼를 치는 목자가 되었다. 그날도 그는 양 무리를 몰고 더 좋은 목초지를 찾아 황량한 사막을 헤매었다. 간혹 눈에 띄는 볼품없는 가시떨기를 보면서 초라한 목동으로 전락(?)한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을 것이다. 보잘것없는 마른덤불로 엉켜 사는, 지나가다 스치면 앙상한 가지가 ‘툭’ 하고 부러지는, 아무 존재감 없는 흔하디 흔한 광야의 그 왜소한 나무가 한편으로 히브리 민족의 고달픈 운명인양 한숨을 길게 내쉬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근데, 그는 우연히 낯선 광경을 목격했다.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는데 그 가지가 스러지지 않았다. 뜨겁고 건조한 땅에서 가끔 자연발화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지만 얼마동안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 나무는 타지않고 환하게 빛났다. 이는 이른바 모든 것을 체념한 모세(떨기나무)에게 소멸되지 않는 불꽃(야훼 하나님)으로 당신 스스로를 드러내신 카이로스적 사건이었다.
기억하는가? 과거 수백 년 전, 조상 아브라함에게 출애굽(Exodus)의 약속을 처음 하실 때에도 여호와 하나님은 연기나는 화로와 함께 타는 횃불형상으로 임재하셨다.(창 15:12~17)
광야(미드바르)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은혜의 장소이다. 모세는 불타는 떨기나무가 타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다시 그것을 보려고 돌이켜오는데 그때 하나님이 그의 이름을 두 번 부르셨다. 그리고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고 말씀하셨다.
이력(履歷)의 리(履)는 밟을 가죽신을 뜻하고, 력(歷)은 지금까지 지나온 자취인 경력을 일컫는다. 한마디로 인간 삶의 궤적이다. 성경적 의미에서 신을 벗는다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겸손히 인정하고 그 분의 뜻에 절대 순복해야 함을 가리킨다. 설사, 맨발로 물 없는 간조한 땅을 걷는 것 같은 고난이 따를지라도 말이다. 뿐만 아니라 신을 벗는다는 것은 자신의 권리를 양도하거나 소유권(혹 기업)을 포기한다는 행위이기도 하다.(룻 4:7~8)
유대인의 전승에 의하면 신 바벨론의 느부갓네살 왕은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솔로몬의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자 했다. 그런데 케루빔이 날아와 그의 머리를 ‘탁’ 치면서 “네 금빛왕관을 벗고 무릎을 꿇어라”고 나무랐다. 요컨대 신을 벗는다는 것은 자신의 금빛왕관(자아)을 내려놓는 일이다. 우리가 주님 앞에선 세상의 지식과 신분과 명예와 권력(富)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정미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