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6월 대만 총통 리덩후이는 모교인 미국 코넬대를 방문했다. 미국 정부는 중국의 반발을 의식했지만, 미국 의회가 나서 리덩후이 총통에게 비자를 발급하라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반발한 중국은 군사훈련을 시작했다. 대만해협을 봉쇄하고 미사일을 발사하고 인민해방군을 대만과 가까운 푸젠성에 재배치했다. 8개월간 지속된 3차 대만해협 위기였다. 미국은 항공모함 2대를 동원해 중국의 반발을 진압했다. 인디펜던스호에 이어 니미츠호까지 대만으로 급파했다. 베트남전 이후 최대 규모였다. 1996년 3월 리덩후이 총통이 연임에 성공하자 중국은 후퇴를 결정했다. 인민해방군은 원 주둔지로 복귀했고, 3차 위기는 해소됐다. 미국의 무력시위에 중국이 굴복한 것이었다.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으로 대만해협에 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다. 3차 위기 이후 26년 만에 4차 위기가 시작됐다. 미국은 중국의 도발을 억제하기 위해 7함대 소속 항공모함 레이건함과 강습상륙함인 트리폴리함·아메리카함을 대만해협 인근 필리핀해역으로 출동시켰다. 미 전함과 전투기가 대만해협 해상과 상공을 통과하는 무력시위에 나설 것이라는 예고도 나왔다.
중국의 반응은 3차 때와 달랐다. 미 항공모함 2척에 굴복했던 과거의 모습이 아니다. 중국은 대만 봉쇄 훈련에 항공모함 랴오닝함과 산둥함 2대에다 핵추진잠수함을 동원했다. 최첨단 스텔스 전투기도 참여했다. ‘항공모함 킬러’로 불리는 둥펑(東風·DF) 계열 탄도미사일 훈련도 했다. 미 항공모함에 맞서겠다는 의지다. 중국의 항공모함이나 전투기가 미군보다 성능이 떨어진다는 게 일반적인 평가다. 다만 대만해협에서 중국과 미국이 맞붙으면 중국이 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많다. 이번 대만해협 사태의 결과는 예측이 어렵다. 다만 군사력을 키워온 중국이 태평양에서 미국에 맞설 수 있을지, 미국이 중국을 봉쇄하는 군사력 우위를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 가늠해볼 계기가 될 수 있다. 미국의 대응이 중요해졌다.
남도영 논설위원